[사설] 대통령 '傲氣정치' 반성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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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관련 특검법안이 국회에서 재의결됐다. 재의결된 특검법에 대해선 대통령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이젠 집행만 남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회가 재의결하면 수용하겠다고 했으니 특검법을 곧바로 공포해야 하며, 검찰도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겠다느니 하는 등의 발상은 거둬들여야 한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그것도 재의결에서는 1차 때의 1백84표보다 25표가 늘어난 2백9표란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법안인 만큼 정부는 겸허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도대체 盧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남긴 게 뭔가.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 무슨 보탬이 됐는가. 청와대가 곧잘 사용하던 '윈-윈'은커녕 대통령과 정치권 모두 패자가 돼버리지 않았는가. 이 9일 간의 청와대와 야당 간 극한대치로 황폐화한 정치권에 남은 것은 극도의 불신과 대립뿐이다. 대통령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엄청난 정치적 부담만 안게 됐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내년도 예산안 등 각종 법안과 의안에 대한 처리가 늦춰졌으며, 이젠 시간에 쫓겨 겉핥기 심의가 불가피해졌다. 한나라당이 국회를 외면한 게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1차적 책임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된 인식이나 결정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번에도 잘 보여주었다. 거부권 파동만 없었어도 단식하고 등원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여야가 이렇게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회가 굴복을 강요한다'는 盧대통령의 오기가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오히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재의결에 성공했으니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단식농성을 끝내야 한다. 야당도 지나치게 대통령을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盧대통령도 이번 파동을 교훈삼아 국정 현안에 대해 초당적 협조를 구하고, 내각과 청와대 개편을 통해 국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