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없는 경찰 난맥행정/제정갑 전국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강압·납치 등에 의해 윤락행위를 강요하는 범죄를 근본적으로 막아보자는 목적에서 경찰이 실시한 유흥업소 여종업원의 카드관리가 시행 보름만에 중단,해프닝으로 끝났다.
경찰청은 25일 이 카드관리 실시가 「인권·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다」는 일부 여론의 지적에 따라 이를 전면 중단한다며 지금까지 작성한 8천5백여장의 카드를 폐기처분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여성단체등에서는 이 카드관리가 『취지는 좋으나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고 이 자료가 공개된다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친지들까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왔다.
경찰청 고위간부는 일부에서 이같은 여론이 일고 있는데 굳이 경찰이 이를 강행해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시행을 중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드관리 실시이후 경찰이 유흥업소에 대한 일제조사에 나서 그동안 미성년자를 고용한 업주 1백20명,윤락행위를 강요한 업주 81명 등을 검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더욱이 카드관리는 당초 여성의 납치와 강압에 의한 윤락행위가 심각할 정도로 성행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범죄와의 전쟁 차원에서 뿌리 뽑아보자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카드관리대상을 전국 58개 사창가를 중심으로 거의 우범지역화된 곳의 여종업원으로 잡고 연말까지 일일이 취업동기를 조사,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윤락행위를 하는 경우 귀가조치하거나 사회보호시설에 인계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당초 이같은 취지를 제대로 살려보지도 못하고 어떤 이유로든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경찰력의 운영과 범죄대응방법에 있어 난맥상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면서도 경찰은 여전히 『모든 동사무소에 비치된 주민등록 수준 밖에 안되는 이 카드관리가 무슨 인권·사생활 침해냐』고 반문하면서 어쩔수 없이 여론에 밀려 철회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카드자료의 공개를 방지하는 등 운영의 묘를 꾀해보는 대신 아예 카드관리 자체를 철회하면서도 날로 급증하는 여성상대 범죄에 대한 다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찰이 여론(그것이 소수이든,다수이든)에 민감한 것은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 있으나 아무런 소신과 철학이 없이 「경박스런 시행착오를 이와 같이 되풀이 하는」 한 새로운 위상의 정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