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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시베리아 열차 횡단기] 2. 가장 먼 철길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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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쪽 끝이다. 역 플랫폼에는 철도 시발점을 기념하는 쇠기둥이 서 있는데 숫자 9288은 철도의 길이를 나타낸다.

지난 6월 25일 오후 3시38분, 블라디보스토크 항공 소속의 소형 비행기 인천공항 이륙. 약간 흐림. 햇빛. 30분 연발이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불가사의는 이 여행의 매력. 발 아래 바다. 승객이 빼곡한 기내에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말이 도랑물처럼 쏟아진다. 시작이다.

약 두시간 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도착. 비행기에서 내려설 때 지상에서 기다리는 키 큰 제복의 여성들, 그들의 무표정 때문일까? 여행이 아니라 연행당하여 온 느낌. 나는 이런 반공 콤플렉스 속에서 성장했다. 그 생래의 공포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약간의 바람. 도열한 자작나무들. 공항 대합실의 좁은 실내. 어느새 내국인들은 다 빠져나가고 한국인들만 좁은 홀에 가득. 나는 이런 대접에 이미 습관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캐나다에서… 우리들은 흔히 밀항자처럼 격리되어 처분을 기다리곤 했다. 조급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시작일 뿐. 갈 길이 멀다.

한시간 정도 지나자 내 차례가 되었다. 유리 칸막이 저쪽에 꼬마 선풍기를 틀어놓고 내 여권과 서류들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여자, 그녀의 귓밥에는 꼭 우황청심환만한 도금의 귀고리가 무겁게 흔들리고 있다.

여권심사(passport control)가 끝나자 또 하나의 검사대 유리 칸막이. 이번에는 깡마른 미인형의 또 다른 여자. 그녀의 귓밥에도 또 한 쌍의 우황청심환. 입국수속(immigration)이다. 이 대목을 나는 그냥 귀찮게만 생각했을 뿐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매우 중요하다.

잠시 전의 여권심사 때는 어느 외국에 입국할 때와 다름없이 여권상의 비자 옆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절차다. 그것은 '빅 스탬프'였다. 그런데 이번 입국수속 때는 또다시 '스몰 스탬프'를 받아야 한다. 이번은 여권이 아니라 별도의 입국카드 이면에. 이 스탬프가 찍힌 보잘것없는 흰 종이는 여권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제부터 숙박하는 호텔마다 이 종이 이면에 도장을 찍어줄 것이다. 다음 숙박지에서는 반드시 그 전에 숙박한 곳을 알고 싶어한다.

레기스트라차라고 불리는 거주 등록. 이건 분명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원래는 러시아에 입국해서 3일 이내에 비자 등록을 해야 하고 각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도착한 지 3일 이내에 도시 등록을 해야 한다. 지금 스몰 스탬프는 그 도시 등록을 대신하는 것이다. 러시아 당국의 눈은 언제 어디서나 나의 여정을 들여다보고 싶어하고 또 그것을 환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거동은 일단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체제는 끝났지만 오랜 관행은 여전히 삼엄하다. 그러나 이것도 시시각각 변한다. 어제의 잠입탈출이 오늘은 관광 혹은 애국이 되듯이.

손짓을 통해 겨우 흥정한 택시. 호텔 블라디보스토크. 철통같이 믿었던 예약은 녜트! 오랜 기다림. 전화, 토론, 문의, 서류기입… 드디어 5006호실 배정. 50달러. 그러나 받은 것은 방 열쇠가 아니라 종이 한 장, 입실카드다. 5층 복도 입구에 덩치 큰 여자가 책상 뒤에 앉아 있다가 간수처럼 내 입실카드를 받아 오랫동안 대장에 기록. 그리고 열쇠를 꺼내들고 방을 안내한다. 이 나라에서는 도처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대장에 기록한다. 작은 가게에서 빵을 팔아도 대장에 기록한다.

허름한 TV와 침대가 놓인 방. 칠이 벗겨진 창문을 여니 망망대해. 저것은 바다일까 강일까? 블라디보스토크는 치안이 불안하다고, 마피아가 무섭다고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판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마피아들은 매우 바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신 같은 별 볼일 없는 관광객에게는 관심이 없다. 좀도둑이나 조심하라." 거기서 용기를 얻어 우리는 밖으로 진출. 여행의 각별한 재미는 바로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휘파람을 불며 낯선 거리로 나서는 이 불온한 유혹의 저녁시간이 아니던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망루 같은 언덕길에는 젊은 남녀가 쌍을 지어 가끔 지나갈 뿐 한가하다. 불안한 기분 속에서도 바다를 배경으로 저녁빛에 지워져가는 러시아 여인들의 늘씬한 각선미 쪽으로 자꾸 눈이 간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바닷가. 광장의 흐릿한 불빛의 유혹. 우선 보드카 한잔이 생각난다. 여기저기에 우리나라 시내 버스 정류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멍가게 두 배쯤 되어 보이는 키오스크들. 음료와 과자를 유리창에 진열해놓고 팔지만 루블화로 환전하지 못해 아무것도 살 수 없다. 호텔로 돌아와 4층의 바로 올라간다. 간단한 식사와 술을 파는 곳.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젊은 미인형의 러시아 여인, 그녀의 무표정이 더욱 마음을 끈다. 간신히 통한 몇 마디 영어. 달러화도 오케이. 보드카 잔술과 훈제 돼지고기가 깔끔하다. 연거푸 여덟 잔씩을 마셨다. 내가 암기한 몇 개 단어 중에 '보스토크'는 '동쪽'이라는 뜻. 블라디는 정복자, 용감한 자. 블라디보스토크는 원래 슬라브족이 시베리아를 개척하여 '동방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건설한 도시라는 의미지만 40도 보드카로 불콰해진 나 자신이 마치 동방의 지배자나 된 기분이 된다. 내일이면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는 것이다!

6월 26일. 호텔 바에서 라면으로 아침식사. 한국인에게 유명한 시내의 '현대호텔'로 가다. 환전. 하바로프스크 호텔 예약에 한시간이 걸렸다. 배들이 정박해 있는 길을 따라 가다가 제정러시아 건축물인 아름다운 역사 발견.

기차 승강장 옆 안내 창구에서 오래 줄을 선 끝에 기차표 사는 요령을 터득하고 창구 앞으로 이동, 또 하염없이 줄을 서다. 우리 차례가 되자 등 뒤에 서 있던 뚱뚱한 아주머니 둘이 떠밀고 앞으로 나서서 새치기를 한다. 막무가내다. 영문을 알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역부족. 이런 형이상학적 부조리의 감정은 여행의 덤인가 덫인가? 기차표를 사는 일이 장난이 아니다. 여권과 서류들을 제시, 느린 동작의 기록, 컴퓨터 조회… 이번엔 다른 아낙이 또 새치기. 다음에는 뒤에 있던 젊은이가 나선다. 표는 뒤에서부터 파는 것인가? 아니다. 그의 짧은 영어가 우긴다. 자기는 본래 우리 앞에 서 있었으나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끝내 이 '신비'를 해득하지 못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다툴 수도 따질 수도 없다. 싸우면 일단 외국인에게 불리한 소비에트. 마침내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의 정복차림의 군인들은 새치기를 하려하지 않아 하바로프스크행 룩스(1등) 표 2장 구입 성공. 오후 6시 '카메라'(짐 맡기는 곳)에서 배낭을 찾아 메고 객차 앞으로 간다. 홈의 출입구에 서 있는 여 승무원에게 여권과 기차표 제시. 7호차 3번 룸. 11, 12호석. 이제 우리 앞에는 모스크바까지 9천2백88km의 철길이 뻗어 있다. 서울~부산 간 거리의 20배가 넘는다. 나는 지구 둘레의 4분의 1, 세계 최장의 철도에 오른다.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교수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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