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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영원한 백제의 넋 낙화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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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꽃보다 더 붉고 꽃보다 더아름다운 빛깔로 이 나라의 산천을 물들이고 간 딸들이 있었다. 저 7백년 왕조의 백제가 무너지던 날, 백제의 어여쁜 딸들은 높디높은 바위벼랑에서 꽃다운 젊음을 던져 역사위에 빛나는 정절을 새겼으니 낙화암은 그로부터 얻어진 이름이요, 백제 또한 그로부터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사는 넋을 심어준 것이다.

<부여팔경의 하나>
조선조의 대시인 서거정이 일찍이 「부여팔경」을 노래했으니 그 하나인 「낙화암」이 더욱 큰 울음으로 귓전을 때리는 것도 그 까닭이다. 「백제의 신하와 백성들이 눈물로 수건을 적시었다지만 떳떳한 충절이 누가 있던가 그날 바위에 떨어진 꽃이 아니던들 옛터의 산과 물은 봄이 와도 적막했으리.」(백제신민누만건 당당충의유하인 고무당세암화낙 고국강산적막춘) 백제는 온조가 한성(광주)에서 나라를 세운 뒤 문주왕 원년(475년) 능률(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다시 성왕16년(538년) 사비(사비-지금의 부여)로 다시 천도해 「사비시대」를 열게 된다. 사지는 소부리라고도 불렀는데 소부리는 신라의 서라벌과 같은 서울을 뜻하는 말이었다.
사비에 와서 여섯 임금을 거치면서 백제는 국력의 융성을 가져왔고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워 신라와 고구려를 위압하는 강대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31대 의자왕은 나라일을 접어두고 술과 여자에 빠져 나라가 기울기 시작한다.
의자왕은 나라일을 돌볼것을 간곡히 아뢰는 주평 (영의정) 성충을 옥에 가둔다. 성충은 옥중에서도 외적이 쳐들어올 것을 예고하고 「적군이 쳐들어오면 뭍으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하고 물길로는 기벌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라는 상소를 올리나 의자왕은 들은 척도 안하고 충간을 하는 좌평 흥수마저 귀양보낸다.
왕도가 흐트러진 백제를 넘보던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군사를 불러들여 의자왕 20년(660년) 육지와 바다에서 공략한다. 이미 성충은 감옥에서 죽었으므로 당황한 의자왕은 장흥에 유배보낸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지혜를 얻고자한다. 홍수는 곧 답을 보낸다. 『백강과 탄현은 한명의 군사가 창하나만으로 지켜도 1만명이 못당할 것입니다. 용맹한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서 당나라 군사를 막을것이요, 탄현에서 신라를 저지토록 하십시오.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적군이 양식이 떨어지고 지친 뒤에 나가서 치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흥수의 공을 두려워한 못난 신하들은 『흥수는 임금을 원망하고 있을 터인즉 그사람의 말을 곧이듣지 마소서』라고 어리석은 의자왕의 마음을 흔들어 백제는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걷고 만다.
신라군이 무방비의 탄현을 넘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달율(좌평다음 벼슬) 계백으로 하여금 황산벌로 나아가 김유신장군을 맞아싸우게 한다. 계백은 외친다. 『옛날 월나라의 구천은 5천명의 군사로 오나라 구만 대군을 쳐부쉈다. 이제 크게 분발해 나라에 충성토록 하라.

<의자왕 패망자초>
계백이 이끄는 5천명의 병사들은 사기를 높였고 김유신의 5만여 군사를 맞아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신라군의 진영에서도 결사대가 조직된다.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은 16세에 화랑의 몸으로 전쟁에 나가 계백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노장 계백은 어린 관창을 돌려보내 주었고 이를 부끄럽게 여긴 관창은 다시 출동해 계백에게 목을 베이고 만다.
계백은 어린 관창의 용맹함을 보고 신라군의 힘을 읽었고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에 분발해 황산벌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한편 인천앞바다 덕적도에 진을 치고있던 소정방은 기벌포로 들어와 백강을 사이에 두고 부소산성을 공략한다. 그런데 안개구름이 강에서 피어올라 좀처럼 쳐들어갈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정방에게 일러주었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옥이 죽어 호국룡이 되어 이 강에 살고 있다. 그 용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다. 용을 잡자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해야한다.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해 용을 건져 올렸더니 안개가 가셔 부소산성에 쳐들어갈 수있게 되었다는 그 전설에서 백강은 백마강이 되었고 용을 낚은 바위는 조룡대라는 이름을 얻어 낙화암아래 지금도 엎드려있다.
저 삼국문화의 으뜸을 자랑하던 백제는 임금의 무분별한 방탕으로 그렇게 무너졌다. 유의손이 쓴『계주교서』 에 「백제가 낙화암에서 망한 것은 술때문이었다」고 적은 것을 미루어봐도 한 왕조의 몰락이 잘못 만난 임금 때문이었음을 실감케한다.
낙화암은 옛 도읍지 부여의 북쪽을 에워싼 부소산의 북쪽 낭떠러지에 있고 그 아래로 백마강이 굽이져 흐르고 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백제정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이 흐르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의자왕이 여러 궁녀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고 이곳에 거느리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죽었다. 그래서 「타사암」 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고귀한 나라사랑>
그러나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다만 궁녀들만 떨어져 죽은 것이요,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이 당사에 밝혀져 있다』고 쓴 것으로 보아 고려때까지도 타사암(타사암-떨어져 죽은바위)으로 불려지던 것이 그후에 낙화암으로 굳어진 듯하다.
임금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욕되게 남의 나라에 끌려갔거늘 어리고 힘없는 여인네들은 바람에 지는 꽃잎이듯 바위에서 강물로 몸을 던졌다. 세상에서는 3천궁녀라고 하나 그 숫자야 열이면 어떻고 백인들 어떠랴, 거기 살아 숨쉬는 한없이 고귀한 나라사람의 마음이 있음에야.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에도 복신·도침등이 유민들로 부흥군을 결성, 3년동안 당의 진주군에게 필사의 항전을 하였다. 그 최후에도 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유민들이 있었다. 이렇듯 망국의 한이 펄펄 끓고있는 낙화암의 부여는 참으로 많은 시가 바쳐져왔다.
신흠은 『부여팔경』에서 「낙화암의 아침안개」를 이렇게. 노래하고있다.
「백제의 왕업이 또한 부질없구나
누가 뜬구름을 잡아
백년을 헤아릴수 있으랴
다만 낙화암의 푸른빛은
아침이 오고 아침이 와도
변치 않고 있구나.」
이승소도 『부여회고』를 남겼다.
「백제가 하루 아침에 떨어져내리니
언덕위에는 모두 신라와 당나라 깃발이구나
슬프다 고기떼의 뱃속에 묻힌
궁녀들의 향기로운 넋이여
봄바람을 타고 강위의 꽃으로 피는구나.」
「신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낙화암」세글자를 놓고 명시 한편을 짓는다.
「어젯밤은 꽃이 활짝 핀산아래 집에서 잠을 자고 오늘 아침은 꽃이 지는 물길을 건너서 왔어라 봄빛이란 어쩌면 사람이 오고가는 것과 같은 것 겨우 피는 꽃을 보노라면 또 꽃은 지고 마네」 낙화암에서 절벽 아래로 2백m쯤 내려가면 백마강을 발치에 두고 깎아지른 암벽밑에 고난사가 있다. 세종때 편찬한 『향방약성대전』에 「원효대사가 사지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셨는데 물맛을 보고 강의 상류에 진난과 고난이 있는 것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란사 뒤쪽 바위틈에 갓돋아난 열무싹 같은 푸른잎새가 붙어있고 「고란초」라는 흰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이절 이름은 바로 고란초에서 얻은 것이 틀림없다.
백제때부터 절이 있었다고도 하고 고려때 3천궁녀의 넋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고도 하는데 이 고란사의 종소리·풍경소리가 시가 되어 울려퍼지고 있다.
서거정의 『고난사』가 먼저가슴에 와 닿는다.
「고란이란 옛절에는 고란이 산다네
난초잎 난초꽃은 달을 띠로 두르고
산새도 망국의 한을 아는가 고란이 피처럼 피면 오늘토록 운다네.」 이경석은 「고란사」를 이렇게 읊고있다..
「백마강 거리에 물결은 높고 부소산 밖에 저녁해가 밝구나 흥망의 옛 자취는 간데없고 다만 고란사의 풍경만이 우는구나.」

<옛자취 간데없어>
부여의 명소를 어찌 이루다 밝히랴, 「부여팔경」만 해도 신흠과 서거정이 서로 다른것을. 1926년 공주에 사는 석진충이란 사람이 비매품으로 펴낸 『부여고금시가집』에만 1백70수의 시가 실려있다. 그밖에 1천3백년 동안의 시를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랴. 이미 백제때 H만호의 큰 수도였던 부여는 지금은 작은 군소재지로 머물러 있다.
음내 바로 뒷산이 부소산이고 부소산에 오르면 1919년에 지은 사비루(사비누)가 있다. 본래 부여의 이름인 「사지」와 「사비」는 획하나 차이로 「사비」와 「사지」가 엇갈려 혼란을 가져오기 일쑤다. 「반월성너머 사자수보니」하는 노래만 해도 그렇다. 반월성은 부소산성의 또 하나의 이름이고 사자수는 백마강 (사비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낙화암에는 1929년 이지방의 시모임인 「부풍시사」에서 3천궁녀를 기리는 뜻으로 세운 「백화정」이 있다.
끝으로 노래로 불린 춘원 이광수의 시 한수를 옮긴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를 불건만
맘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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