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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영농』후계자 2,500명 배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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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경북문경군산양면현리산9 「자연은행」 농장주 채희준씨(57)는 옹고집에다 입담 좋고 과격한 성품하며 쉽사리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논밭 4천6백평·임야 4만5천평등 전재산을 털어 「자연은행」이라는 농장을 설립, 자칭 총재로 취임한뒤 복지농촌의 꿈을 실현키 위한 젊은 영농 후계자들을 양성해온 그의 일생은 유별나다.
건국이래 영농교과서처럼 이나라 관치영농의 규범이 되다시피한 농촌진흥정책, 관주도의 농사정보를 철저히 불신하고 농민들 스스로 대물린 전통적인 영농경험의 바탕에서 자율영농을 권장해온 것부터가 그렇다.
이때문에 행정당국에서는 영농시한에 쫓기는 농사철마다 관치영농시책을 두고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다.
그가 독자적으로 영농후계자양성에 뛰어든 것은 71년. 올해로 20년째다.
6·25전쟁 이후의 혼란기이던 1950년대말 당시 집안이 유복했던 덕분에 서울까지 유학가 고려대농대 임학과를 졸업, 경북도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명문대학을 나온데다 영주군수를 지낸 선친의 음덕으로 말단공무원 답지 않게 이른바 황금방석인 좋은 자리만 옮겨다녔다.
그러나 돈을 몰랐던 그는 부패한 상관에게 부정부패 사례를 조목조목 따지며 대들기 일쑤였고 오염된 공직사회에서 자신의 정신마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사표를 내던졌다.
공직생활 10년만의 일이었다. 대물려 받은 양조장 경영에 나섰으나 여기에도 사업상의 권모술수가 필요했고 추잡한 거래까지 얽혀 손을 떼고 자연속에 파묻혔다.
자연이라야 동구밖에서 두어마장쯤 떨어진 소백산 줄기의 종산이 전부였다.
가파르고 험준한 해발 1백50m의 악산에 초지조성사업을 벌였으나 이 산을 오가는데 폭80m가 넘는 금천이 가로놓여 있어 장마철엔 으레 발이 묶이기 일쑤였다.
71년2월 사랑방에서 노름판을 벌이던 마을청년들을 모두 밖으로 끌어냈다.
이 청년들로 망월회를 조직, 주민숙원사업인 금천교 가설공사에 들어갔다.
건자재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부담하고 주민들의 노력동원으로 1년여에 걸쳐 폭8m·길이1백2m외 교량을 가설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당초 정부가 주도하는 새마을사업이 미덥지가 못해 새마을의 「새」자도 떠올리고 싶지않았으나 교량을 건설하고보니 나도 모르게 하루아침에 새마을지도자로 변신했더군….』
그의 자력사업이 청와대에까지 보고돼 그 당시 화폐가치로는 거액인 50만원의 대통령하사금까지 받고 티끌만큼도 원치않았는데 새마을지도자 문경군협의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 모두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같이 뜻밖에도 새마을운동의 바람을 타게된 그는 우선 이농현상부터 막아야겠다며 「자연은행」을 설립하게 됐다.
낙농부국 스위스의 방목장처럼 수림이 울창한 산림에 초지를 조성하고 젖소를 물어 키우는 임간초지목장을 만들었다.
젖소가 이 초지에서 물을 뜯고 쇠똥을 싸고 오줌을 누면 자연 토양개량이 돼 산성화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지조성의 지름길이라는 그의 「쇠똥철학」이다.
토양개량이 된 땅에 유실수를 심고 약초도 재배하면 그만큼 소독이 오른다는 계산이다.
젖소 30마리를 들여와 방목하면서 축사를 짓고 영농 후계자 30명을 수용할 기숙사, 강당·식당등을 고루 갖춘 연수원도 마련했다.
『성실하게 땀을 흘리면 자연은 반드시 보답한다』며 간경군과 인근 예천·상주군등지에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방을 써붙여 연수생들을 모았다.
「자연은행」을 일궈 거둬들인 소득은 모두 연수생들에게 되돌려준다는 원칙으로 침식을 제공하고 봉급까지 지급했다.
그런데도 「자연은행」에 처음 들어온 영농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어긋난다』며 불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날이면 낱마다 농사짓고 젖소 기르고 두엄을 쌓는등 머슴살이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표어가 곳곳에 붙어 있었고 「자연은행」총재이자 연수원장인 채씨는 입에 발린듯 말끝마다 욕설로 대하기 일쑤였다.
하루도 못견디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며칠참고 기다리다 도망치듯 연수원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는『열명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진정한 영농 후계자만 양성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교육기간도 정하지 않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는 식으로 연수원을 운영했다.
그 결과 적게는 연간 1백여명, 많게는 3백여명씩 자연에 애착을 갖는 영농 후계자를 양성했고 그들로 하여금 자립영농의 기반을 다지도록했다.
『영농이란게 뭐 별게 있습니까. 우리식대로 흙냄새를 맡고 자연을 가꾸는데서 얻는 경험이 중요하지요.』
그는 자연에 성실한 마음가짐을 심어주기 위해 연수생들에게 무엇보다 노동력을 아끼지않는 자극이 필요했다.
그래서 연수생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우도 서슴지 않았으며 일 안하고 엄살부리는 사람은 가차없이 내쫓았다.
이때문에 쫓겨난 연수생이 「일하기 싫으면 먹지말라」는 표어가 『빨갱이 구호같다』며 그를 간첩으로 몰아 당국에 신고한 일도 있었다.
하루 8시간의 농사일과 연수가 고되어 축 늘어진 연수생들을 볼때마다 그는 대중가요를 불러 격려해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영농 후계자는 모두 2천5백여명. 이가운데 60쌍의 결혼도 주선했다.
그러나 그는 『농산물값이 몇푼 오를 경우 당장 외국산 농산물 수입부터 생각하는 당국의 정책이 바뀌지 않는한 농촌발전은 기대할수 없다』며 『우리 농촌이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응하고 2000년대의 복지농촌을 가꾸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관치영농에서 벗어나 영농자율화·농산물가격 자율화등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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