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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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 정선생께서는 그러나 언제라도 웃음을 웃고 있는 그러한 호랑이의 인상이었다.…군자의 인품을 풍기고 있었고 그야말로 뿌리깊은 나무를 문득 연상케도 하는 예의바른 분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그중 오래된 토속신이 살고 있는 『성황당』을 기점으로,한 시대의 첨단을 걷는 『자유부인』의 위험한 곡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받은 갈채속에는 그늘진 면의 정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해서 보낸 박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포효하고 으르렁대는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의 약점에 즐겨 도움을 주는 산의 신령같은 그러한 내면이 그 관상속에 들어 있지나 않은지―.』
여러해전 별세한 여류작가 손소희씨는 정비석씨의 중년시절 풍모를 이렇게 적었다. 바로 며칠전 세상을 떠난 정씨의 인간적 면모와 작가적 위치가 짧은 글속에 아주 적절하게 표현돼 있다.
호랑이 모습의 따뜻한 사람,무게있는 작품으로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바도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의 대중화를 선도하면서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를 누렸던 사람­. 이것이 작가 정비석씨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그는 문학,특히 소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즉 문학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공존하게 마련인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다보면 다른 한쪽을 잃게 된다는 것,어느쪽에 치중하느냐 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문제지만 자신으로서는 그 우선순위를 대중성쪽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작가적 자세 때문에 문학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측으로부터 소외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우선 재미있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앞의 손씨가 말한바 「그늘진 면의 정화」라는 측면에서 고인의 작가적 역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으리라.
그 작가적 역할은 「비석」이라는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고인의 본명은 원래 「서죽」이었으나 35년 신춘문예에 응모할때부터 「비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가 해방후 호적을 아예 「비석」으로 바꾸었다는 것인데,「비석」은 우리말로 하면 「징검돌」,곧 징검다리로 놓는 돌이다. 전세계적으로 애창되는 팝송 가운데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것이 있다. 고인은 「재미있는 소설」로서 험한 세상에 징검다리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정규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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