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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경성야화|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미나미 총독의 정치고분 미타라이(어수선)는 경성일보 사장으로 취임할 때 『일본민족은 세계에서 선택된 우수한 민족이므로 열등하고 힘없는 민속을 정복해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미나미가 시정방침으로 내건 국체명징(국체명징), 내선일체(내선일체), 인고단련(인고단련)은 이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국체명징에서 일본민족의 시조인 천조대신(천조대신)은 우주를 창조한 신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고 일본민족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했다.
이 정신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우선 황국신민시사(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서 학교는 물론 모든 집회마다 부르게 하였다. 조선사람도 황국신민이므로 모두 신사에 참배해야 하고 국어(일본어)를 상용해야하며 따라서 조선어는 폐지되어야 한다. 황국신민인 이상 병역의 의무도 져야하며 조선사람이 황국신민인 이상 성을 일본식으로 고쳐야 한다는 이론이 나오게된다.
미나미총독은 이 같은 근본 방침아래 한가지씩 구체적인 시책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1935년에는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교장의 허가취소 또는 폐교처분을 내렸다.
일본어 사용을 강행하기 위해서 1938년에는 중학교의 조선어교육을 폐지하였다.
l938년 2월에는 조선 육군지원병령을 공포해 4월부터 시행키로 하였다. 지원병 제도는 장차 징병령을 내릴 것을 전제한 것으로 5년 뒤인 1943년에 마침내 조선에도 징병제가 공포되었다.
1938년 7윌1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창립되었고 7일에 경성운동장에서 발회식을 갖고 각지방에 지방연맹을 설치했다. 이것이 2년 뒤인 1940년10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이 「국빈총력」으로 개칭되어 황국신민화 운동이 더욱 강행되게 되었다.
국민정신 총동원 연맹의 발족과 동시에 총독부에서는 공무원과 교원에게 제복을 착용하도록 명령하였다. 모든 관리와 교원은 종래에 입고있던 양복을 벗어버리고 풀빛 국방복을 입게 되었다.
이해 3월에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포됨에 따라 겉으로 현저하게 달라진 것은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가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가 고등여학교로 되어 일본인학교와 명칭이 같아진 점이다. 이 대신 조선어과목이 선택으로 되어서 가르치지 않게 되였다.
교과서도 일본인 학교와 같이 일본 문부성이 편찬한 것을 쓰게되었다.
이렇게 학교 이름을 일본인 학교와 똑같이 한 것은 종래의 차별을 없앤 것이라고 총독부에서는 선전했지만 사실은 황국신민 교육을 철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총독부에서는 1938년 6월에 학교근로보국대 실시요강을 발표하여 우선 경성제국대학과 이화전문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 뒤를 이어 전국민을 대상으로 12세 이상 40세까지의 남녀를 모두 동원하는 근로보국대 시행요령을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국에 방공훈련을 실시키로 하고 애국반을 통해 가정주부들을 동원시켰다.
가정마다 부녀자가 한사람씩 동원되어 일본 여자들이 밭에서 일할 때 입는 「몸빼」라는 검정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흰 블라우스에 삼각건이라는 검정모자를 쓴 다음 물을 담을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나온다. 이들은 반장의 지휘에 따라서 아무개 집에 소이탄이 떨어졌다는 전령을 듣고 일제히 그 집을 향해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지고 뛰어간다. 대문이나 담벼락에 물을 끼얹고 불을 끄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까지 올라가서 불을 끄는 시늉도 한다. 이것이 방공훈련이란 것인데 적의 비행기가 날아와서 민가에 소이탄을 떨어뜨렸을 떼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이밖에 큰길에도 길게 늘어서서 양동이에 잔뜩 든 물을 손에서 손으로 나르는 연습, 사다리를 빨리 오르내리는 연습 등을 거의 날마다 부녀자를 동원시켜서 하였다.
이 같은 부녀자의 동원은 서울사람의 풍습을 크게 변화시켜 놓았다.
서울사람은 그때까지 동네집끼리 어울리는 일이 없이 집집마다 성을 쌓고 혼자 들어앉아서 좀체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 <고려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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