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기간 후 규제 폐지 '일몰제' 있으나 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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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는 목적으로 1987년 도입된 '출자총액 제한제도'는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폐지됐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부활하면서 당초 취지와 달리 대기업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활용된다. 이 법은 98년 시행된 행정규제기본법상 '규제 일몰제(日沒制)'에 따라 언제까지 존속할 것인지를 명시해야 했다. 그러나 관련 법안에는 이 기간이 명시되지 않았다.

정부가 약속했던 규제 개혁 방안이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상공회의소는'98년 시행된 규제일몰제의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을 담은 '규제일몰제 시행평가와 개선 방향'보고서를 26일 내놨다. 규제일몰제는 뚜렷한 사유가 없으면 규제에 존속 기한을 정한다는 '행정규제 기본 법안'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가 지속돼 경제.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는 현상을 막자는 취지다. 그러나 98년 이후 신설된 2549가지 규제 가운데 존속 기한을 정한 경우는 48건(1.9%)에 불과했다. 지난해부터는 아예 모든 규제 법안에 존속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다.

대한상의 기업애로종합지원센터의 황동언 팀장은 "그나마 존속 기한을 정한 규제는 대개 지엽적인 내용"이라고 평했다. 가령 ▶특수 의료장비의 관리자 선임 ▶시장상인회 설립 등록 등이다. 상의 박종남 이사는 "특히 경제 관련 규제는 시장의 활성화를 제한하는 성격이 큰 만큼 반드시 존속 기한을 정하고 사후 평가 기능을 강화해 연장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는 간섭이나 통제를 하기보다 시장원리에 따르겠다는 취지로 각종 규제 개혁 방안을 쏟아냈다. 98년 규제일몰제와 규제총량제.규제영향분석 등을 한꺼번에 도입했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초 "세계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 선진국 수준의 '규제 품질'을 확보하겠다"며 "수요자 중심의 규제 개혁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민관 합동의 '규제개혁기획단'을 구성해 주요 규제를 손보기로 했다. 그러나 2004년부터 2년간 활동할 계획이었던 기획단은 큰 성과 없이 활동 기간을 내년까지로 연장했다.

규제 개혁은커녕 규제가 더 늘고 있다. 각종 규제는 98년 기존 규제의 일제 정비로 일시적으로 감소했다가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7836건이던 규제는 지난해 8083건으로 늘었다. 기업과 경제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7개 경제부처의 규제 건수도 지난해 3467건으로 2003년(3392건)보다 늘었다.

상의 보고서는 규제 개혁이 안 되는 이유로 공무원들의 소극성을 꼽았다. 최근 행정자치부가 작성한 '역대 정부별 공무원 수' 자료에 따르면 전체 공무원 수는 지난해 말 현재 93만3663명으로 2003년 말(88만5164명)보다 확 늘었다. 기업 관계자들은 "공무원 수가 늘어나는 만큼 정부는 규제 개혁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홍익대 김종석 교수는 "시장의 문제를 정부가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공무원들의 사고 방식을 개선하면 기존 법만으로도 우리 규제 품질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양선희 기자

◆규제일몰제=법규나 규제를 완화 또는 폐지할 필요가 없는지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제도다. 규제의 취지가 사라졌거나 줄어들 경우 그 규제를 폐지하거나 일정 기간 후 자동적으로 없어지게 한다. 규제를 신설하면 기존 규제를 폐지하는 규제총량제, 규제 신설에 참여한 공무원의 실명과 소속을 관보에 공개하는 규제실명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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