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총리의 답답한 유엔연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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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답답하다. 2일 있었던 연형묵 북한총리의 연설내용을 보고 이말 말고는 달리 평가할 길이 없다.
그의 연설에 크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엄청나게 바뀌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는 내용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빗나갔다.
대부분 한반도문제 언급으로 시종한 연총리의 연설내용은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있었던 북한측 주장을 그대로 다시 옮겨 적은 것은 아닌가 의아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언제인가. 거의 1년전 일이다.
그 1년동안 격변했던 주변상황,국제정세의 획기적인 진화에 아랑곳 않는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소련의 공산주의 청산과 민주화 노력,미국의 단거리 핵무기폐기선언에 따른 평화조성분위기등 북한의 체제유지나 국제적 위상과 무관하지 않은 혁명적 상황들이 적지 않게 전개돼 왔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북한의 위상과 관련된 것일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안정이나 장래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환경의 변화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북한의 형편으로 보아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으로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신호라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연총리의 연설내용은 이런 현실을 무시한채 아직도 완고한 허구의 논리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논리의 단적인 예가 북한과 유엔과의 관계를 언급한 부분,북한이 주장하는 콘크리트방벽에 대한 부분이다.
연총리는 『유엔가입 이전시기에 있었던 우리나라와 유엔사이에 있었던 과거사의 유산이 옳게 청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6·25를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한 유엔결의를 지칭한 것이 분명한 이 말은 북한이 기본입장을 계속 억지와 허구에 두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솔직하게 시인은 못하더라도 이미 소련 등에서 까지 확인된 남침사실을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북한의 국제적 신뢰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환성을 올리면서도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에 구축된 콘크리트장벽에 대해서는 왜 함구무언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투정같은 말을 하고 있다.
왜 함구하고 있는지 연총리가 더 잘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 제기했다는 「자유왕래와 정치·경제·문화의 전면 개방」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콘크리장벽때문에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총리가 연설에서 1년전과 똑같이 되풀이해 주장했듯이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여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북과 남의 무력을 3∼4년동안 단계적으로 축소하여 각각 10만명 아래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우리도 동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보기에 그럴싸한 주장에 앞서 스스로 허구의 껍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가 말하듯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출발점」을 불가침선언의 채택이 아니라 참다운 현실인식에서 찾아야 될 것이라고 우리는 고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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