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과 진짜 싸움' 이제부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사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현재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은 당적과 대통령직 두 가지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올 1월 4년 대통령 연임제 개헌안을 제안하며 임기를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없고 대통령직을 끝까지 유지하겠다고 못 박았다. 그래서 노 대통령 말대로라면 남은 정치적 자산은 당적뿐이다.

그러나 그 당적을 노 대통령은 버리기로 결심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때 민주당 당적을 버린 것과는 다르다. 그 시점도 대통령 선거를 10개월 가까이나 남겨둔 2월 말이다. 당초 여권 내에서 얘기됐던 3, 4월보다 이르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이른 결단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여당 당적을 버린 것은 9월이었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1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5월이었다. 노 대통령의 조기 탈당 결심은 그래서 이례적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대선이라는 큰 판을 앞두고 분위기 쇄신이 절실한 열린우리당의 진로에 걸림돌이 돼선 안 되겠다는 정치적 책임론이고, 또 하나는 민생개혁법안과 개헌안 등 남은 역점 과제를 처리하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의지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 측은 임기 말 아들 또는 친인척 비리에 시달려 국정 장악력이 떨어졌거나 미래 권력인 여권 대선 후보와의 갈등에 밀려 타의로 탈당한 전임들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경우 조기 탈당 결심에 '선택'의 측면이 작용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차별화된다.

하지만 대선이라는 변수를 놓고 보면 노 대통령이 처한 상황은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할 때 결코 낫다고 볼 수 없다.

여권 내에서는 유력 대선 후보가 아직도 부상하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낮은 여론 지지율과 사상 초유 여당 의원들의 집단 탈당 여진이 계속되는 등 깊은 좌절에 빠져 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임기 말에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여당 인사들은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을 노 대통령에게로 돌리고 있다. 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을 경우 후속 탈당을 하겠다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런 만큼 노 대통령의 조기 탈당 결심은 선택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위기 상황의 절박감에서 꺼내든 고육지책의 측면이 있는 셈이다.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의 탈당 카드는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며 "열린우리당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노 대통령이 탈당 카드를 던지는 심정은 여간 착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탈당 이후다.

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임기 말까지 책임을 다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해 왔다.

특히 국정 주도권을 놓아 버릴 수 없다는 의지를 천명해 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여당 당적 이탈은 앞으로 국회 등에서 우군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상황을 의미한다.

대형 이슈를 대통령이 선점한다고 하더라도 추진력은 별개 문제다. 여당 없는 대통령의 정책과 발언이 얼마만큼 힘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노 대통령은 이제 레임덕(임기말 권력 누수현상)과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박승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