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대북정책은 '외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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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흘 뒤 나가사키에 나타난 또 다른 B-29에는 우라늄 대신 플루토늄으로 만든 '뚱보(Fat Man)'라는 별명의 원자탄이 실려 있었다. 소프트볼 크기의 플루토늄을 기폭장치로 에워싸 터뜨리는 내폭식 원자탄 '뚱보'는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공할 핵무기에 '꼬마'와 '뚱보'라는 별명을 붙일 때만 해도 미국은 핵의 비밀을 영원히 독점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 핵무기 제조법은 전 세계 시장통에 돌아다닌다. 미국과 맞장 뜰 각오만 있으면 웬만한 나라는 다 만들 수 있다. 핵은 더 이상 강대국의 위엄이 아니다. 방위비를 감당할 수 없는 빈국이 절망적 상황에서 파멸적 보복을 각오하고 사용할 자폭 수단이 됐다. '위대한 핵'은 이제 없다.

그러나 선군정치에 매달린 북한에 핵은 여전히 위대하다. 이번 베이징 회담에서도 영변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이외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나 핵무기 문제는 언급도 못하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13 합의'에 잔뜩 기대를 건다고 했지만 미국과 북한은 앞으로도 같은 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문제를 풀 공산이 크다. 미국이 풀 문제는 북한의 핵시설.핵물질.핵무기.핵무기를 탑재할 미사일이지만 북한이 풀고 싶은 문제는 에너지와 체제 보장이다. 미국의 목표인 '핵 폐기'가 북한에는 수단일 뿐인 비대칭 협상이다.

이런 협상은 한쪽이 결단을 내려야 끝난다. 그러나 그럴 조짐은 없다. 이번 베이징 합의의 배경인 미국의 변화도 '결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체니 부통령의 대북 원칙론과 국무부의 현실론이 맞붙자 대통령이 일단 국무부를 편들었을 뿐이다. 이란 문제와 이라크 추가 파병이 급한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백악관 내부에서조차 합의가 불충분했다는 정황은 현직 백악관 안보부보좌관이 베이징 합의 직후 이를 비난하는 e-메일을 무더기로 날린 사실이 보여준다. 평양도 마찬가지다. 평양 말대로라면 '뚱보'를 만들 영변 플루토늄 시설도 폐쇄가 아니라 가동 중단일 뿐이다. '꼬마'를 만들 영변 바깥의 핵 시설과 완성된 핵무기를 다룰 경우에는 테이블을 엎을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하는 대로 줘도 남는 장사"라지만 블랙박스와 같은 평양을 기대와 낙관만으로 상대하기는 이미 벅차다.

외교는 낙관이 아니라 비관에서 출발하는 현실 게임이다. 꿈을 꾸는 일이 아니라 꿈에서 깨는 일이다. 두 개의 국가권력이 대치한 한반도에서 남북 관계도 본질은 국제 관계다. 그러나 평양이 대남 전략을 '대미 항전'의 종속변수로 보는 한 남북 간의 어떤 선언과 합의도 외교적 약속이 될 수 없다. 미국을 겨냥한 플루토늄 핵실험 한 방에 날아간 '6.15 공동선언'의 꿈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또 다른 남북 공동선언을 꿈꾸기 전에 대북 지원의 조건과 단계를 핵 폐기 절차와 연계시켜야 한다. 통일부의 '대화'만 있고 외교부의 '외교'는 실종된 기존 대북 정책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남북한이 서로를 '남측'과 '북측'으로 부르는 감상적 무드로 핵 문제와 같은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에누리 없이 주고받는 반듯한 '대북 외교'로 대북 정책을 전환하는 일이 그래서 시급하다.

권용립 경성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