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세력 분열 이어 이념 분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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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까지 나서서 진보 학자와 전면적으로 논쟁하는 게 진보 진영 전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열린우리당 우상호 전 대변인은 19일 이같이 걱정했다. 같은 당의 김부겸 의원은 "진보 진영의 분열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범(汎)진보가 하나가 되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이런 발언들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노무현 정부는 '민주 정부'로서 실패했다. (정권) 교체되는 게 당연하다"는 취지로 말한 데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진보 진영만 사는 나라인가"라고 반격한 이후 쏟아져 나왔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노 대통령의 반격에 대해 "대선에 도움이 안 되는 발언이다. 그간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막판엔 당선 가능성을 보고 우리를 지지했는데 (노 대통령의 발언 이후엔) 앞으론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여권의 고민은 세력 분열에 이어 이념 분열이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집권 세력은 집단 탈당 사태 이후 ▶열린우리당▶김한길 의원 중심의 통합신당모임▶천정배 의원 중심의 민생정치모임 등 세 그룹으로 쪼개져 있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공격으로 진보 진영마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열린우리당 당직자는 "범여권은 몸통(정당)에 이어 정신(이념)마저 분열하고 있다. 반면 보수 진영은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여권에선 노 대통령보다 최 교수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열린우리당 문학진 의원은 "진보 학계의 거두라고 할 만한 최 교수가 오죽했으면 그런 발언을 했겠느냐"며 "대통령이 최 교수의 진정성을 오해하지 말고 다시 한번 곱씹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같은 당 정장선 의원은 "대통령이 논쟁의 중심에 서는 게 넌덜머리 난다"고 했다.

이인영 의원은 "최 교수가 '한나라당 정권 교체' 운운한 건 무책임한 것"이라면서도 "노 대통령이 진보의 진실한 가치를 고리타분하게 보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양쪽을 모두 비판했다.

친노파인 이광재 의원은 "진보가 변해야 한다는 건 1980년대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일관돼온 노 대통령의 생각"이라며 "진보 진영은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나 방폐장 등의 문제에서 이데올로기적 투쟁만 하고 대안을 내지 않았다"고 노 대통령을 옹호했다.

◆"진보 진영의 주도권 싸움"=선거 전략가들 사이에선 "분열된 범여권, 범진보 진영이 대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헤게모니(주도권) 싸움의 성격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비주류 격인 진보 진영 내의 주류.비주류 간 갈등이란 얘기다.

정치 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최 교수를 포함해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지지했던 전통적 진보 진영은 '민족''민주주의'란 거대 담론을 얘기해 왔다"며 "하지만 비주류의 비주류 격인 노 대통령은 '그런 거대 담론이 일상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문제 제기와 함께, 일상 밀착형의 신(新)진보 입장을 펴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탈당 사태 등과 맞물려 보면 정치적으론 DJ 세력과 노 대통령 세력 간 주도권 싸움이란 배경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설 연휴에도 훈계"=한나라당은 노 대통령과 진보 진영을 싸잡아 비판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대통령의 신세가 가히 좌우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패잔병의 신세 같다"며 "구원병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고 도주할 곳도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 대변인은 또 "진보 진영의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비겁하다"며 "민생 파탄과 국가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대통령에게만 씌우는 전형적 꼬리 자르기 전술"이라고 했다.

진보 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은 불쾌해 했다. 박용진 대변인은 "국민의 의견 수렴 없이 맘대로 국가를 운영하고 정책을 펼친 이는 진보 진영이 아니라 노 대통령이며, 진보인지 보수인지조차 국민이 헷갈릴 정책을 펼친 이도 노 대통령"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설 연휴 기간에 대통령이 진보니, 보수니 나눠 훈계해야겠느냐"며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건 분명히 대통령의 아집과 독선"이라고 주장했다.

고정애.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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