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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미국의 우아한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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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이 원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에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다. 수퍼파워를 넘어 하이퍼파워라는 말까지 나왔다. 로마제국에서 대영제국까지 역사상 그 어떤 제국도 누려 보지 못한 패권을 구가하고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은 일방주의를 낳았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한 의도를 갖고 있는 한 미국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의 득세와 9.11 테러라는 묵시록(默示錄)적 대참사로 아메리카 제국의 일방주의는 극에 달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치기 어린 짧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는다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세상엔 미국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절감하고 있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이 돼 가고 있다. 14만 명의 미군에 더해 2만 명을 추가 파병키로 했지만 상황이 호전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라크는 미국 일방주의의 무덤으로 변하고 있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2.13 합의'는 미국의 일방적이고 완전한 후퇴며 양보다. 이미 핵실험까지 마침으로써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 된 북한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정치.경제적 이득을 보장받았다. 100만t의 중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전쟁 이래 반세기 동안의 숙원이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가는 기틀이 마련됐다. 적성국(敵性國)이고 테러 지원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기도 마련됐다.

부시 행정부는 '불량 국가'와는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해 왔다. 또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이번 합의로 미국은 이 원칙들을 다 포기했다. 북한을 유혹하기 위해 종합선물세트까지 한 아름 안겼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당연히 교체되고 사라져야 하는 나쁜 정권이라고 부시 대통령은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북한에 양보하고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일방주의에서 현실주의 외교로의 전환이다.

지금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세계 곳곳에서 도전받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약점을 보이고 있는 틈을 타 자원대국 러시아가 단극(單極)질서를 대체할 다극(多極)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중국과 인도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당분간은 유지되겠지만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다. 길어야 30년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우아한 퇴장'을 준비해야 한다. 힘이 빠졌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원래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것은 남 보기에 좋지 않다. 심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구별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해야 한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180도 유턴은 21세기 미국 외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하다.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정하고, 일방주의에서 현실주의 외교로 선회함으로써 우아한 퇴장의 초석을 다진 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