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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고교 파워인맥’ ⑥] 지구촌 누비는 ‘글로벌 코리안’ 산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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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한때 서울대가 서울고등학교의 본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서울대에 많은 학생을 입학시켰다.”서울고 출신 한 인사의 말이다. 서울고 출신들은 단순히 공부만 잘했던 것이 아니다. 글로벌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의 현주소.


회사와 향우회, 그리고 전국 각급 학교 동창회 등의 송년 모임으로 떠들썩하던 지난해 연말, 이역만리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한 골프장에 20여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이들은 각종 상을 내건 골프대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연말연시 연휴를 이용해 골프여행을 떠난 관광객들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현지에 살고 있는 교민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만날 수 있다는 OO전우회나 OO향우회?

골프대회 후 우승자와 장타상 등의 시상식까지 마친 이들은 갑자기 “인왕의 억센 바위 정기를 타고…”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한국의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생들. 이런저런 이유로 삶의 터전을 인도네시아로 옮긴 서울고 졸업생은 30명이 넘는다.

이뿐 아니다. 서울고는 미국의 워싱턴과 댈러스 등에 동창회 지부가 설립될 만큼 수많은 ‘이민자’를 배출한 학교다. 심지어 미국에는 각 지역 동창회와 별도로 연합 동창회가 있을 정도다.

서울고 출신 ‘글로벌 코리안’은 국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고 출신 중에는 유독 글로벌 기업 CEO와 글로벌 비즈니스맨이 많다.

강웅식 아메리칸스탠다드코리아 회장, 승은호 코린도 그룹 회장, 박기웅 유로통상 부회장, 김성기 한성자동차 회장,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 손을래 아우디코리아 회장, 이상훈 한국바스프 사장, 이인호 한국씨티은행 부행장, 양호철 모건스탠리인터내셔날증권 대표, 이천기 크레디트스위스증권 한국지점 대표, 강우춘 한국노키아 사장 등이 다국적기업 한국지사의 CEO이거나 글로벌 기업과 손잡고 사업을 일으킨 인물들이다.

이들 중 양호철 모건스탠리 서울지점 대표와 이천기 크레디트스위스증권 한국지점 대표는 최근 금융가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들이다. 양 대표는 국내 금융회사에 근무하다 외국계 CEO로 발탁된 경우다. 그는 대신증권에서 시작해 동서증권 최고운영책임자(COO)와 부사장을 지낸 뒤 1997년 모건스탠리에 합류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제금융 전문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그는 한때 국민은행장, 우리금융지주 통합 증권사 사장 등 국내 거대 금융회사의 CEO 자리가 빌 때마다 영입 1순위로 거론되고 있지만 고사 중이다.

서울대에서 MBA를, 미 루이지애나주립대 대학원에서 금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조교수로 기업금융을 강의하기도 했다.

승은호 코린도 그룹 회장은 韓商 대표주자 격

세계 5위 수준의 금융그룹인 크레디트스위스증권 한국지점을 이끄는 이천기 대표는 대우종합기계 지분 매각, 현대차-다임러크라이슬러 전략적 제휴 등 다양한 인수합병 자문 업무를 수행한 투자은행 전문가다.

2002년 최연소 크레디트스위스증권 한국대표로 발탁되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뉴욕의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골드먼삭스 등을 거쳐 크레디트스위스증권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다.

반면 승은호 코린도 그룹 회장은 한국을 떠나 세계로 뻗어나간 한상(韓商)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인도네시아 재계 순위 15위의 코린도 그룹을 이끄는 승 회장은 1970년대부터 인도네시아에서 목재·화학기업을 일으켜 지금은 30여 계열사에 직원이 2만여 명에 이르는 ‘성공신화’를 일궜다.

1942년 만주에서 태어나 서울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승 회장은 1969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뒤 1970년대 초반 원목 개발사업을 토대로 일으킨 회사를 인도네시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76년 코린도 그룹을 세운 뒤 지금까지 현지 주민과의 동화정책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경영 수완으로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인 기업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례로 남았다. 1990년부터 15년째 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맡으면서 교민 뒷바라지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1999년부터 현지 한인상공회의소 소장직도 맡고 있다.

그러나 코린도 그룹이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2001년 1월에는 인도네시아 동쪽 끝 이리안자야에서 직원 12명이 현지 무장 독립운동세력에 납치되는 위기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 부지런을 떨며 현지인들과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해 놓은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직원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코린도는 목재와 신문용지·신발·컨테이너·배터리·부동산·금융·운송·건설 등과 관련된 계열사 30여 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400여 개의 인도네시아 한국계 업체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코린도는 인천 소재 목재업체 동아기업이 1971년 중부 칼리만탄에 진출, 300만 달러를 투자해 설립한 벌목회사를 모체로 그동안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서울고 출신의 한 인사는 이처럼 서울고 출신들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강점을 보이는 이유를 “이북 출신이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의 자제들이 서울고에 많이 진학했다. 지역 연고가 없는 이들은 학업에 전념해 성적도 우수했고, 덕분에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던 해외유학을 떠난 이가 많았다. 낯선 곳에서 살아남는 법이 몸에 배서 그런지 이들은 대부분 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나중에 글로벌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한국으로 돌아온 이가 많다”고 말했다.

이동건 부방 회장은 서울고 졸업생 중 대외활동이 가장 활발한 인물로 꼽힌다. 국제로타리클럽 차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이 회장은 정·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쌓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스스로 “서울고 학연 등을 통해 지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하고나 친분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른바 ‘마당발’로 불리거나 “누구를 잘 안다”며 인맥을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가까이 두지 않는다. “성실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따금한 충고를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성품과 능력을 지닌 사람과 깊이 사귀는 편이다. 다양한 친분에 곧은 성품까지 갖춘 그는 정계 진출 제의도 많이 받았다. 1979년 12·12사태 이후 여·야당에서 모두 정계 진출을 권유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계로 들어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때마다 간곡하게 사양했다. 부산방직을 창업한 선친이 로타리클럽 활동을 통해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던 모습이 큰 영향을 끼쳤다. “선친께서 ‘정치에는 뛰어들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셨습니다. 또 선친을 본받아 로타리에서 연륜을 쌓아가면서 봉사의 외길을 걷겠다는 결심도 있었고요.”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열 LS전선 부회장도 서울고를 나온 재계 오너 중 한 사람이다. 옛 럭키금성상사 회장과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지낸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넷째 동생. 그러니까 구자열 부회장은 고 구인회 회장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구자열 부회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78년 LG그룹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쌓았다. 그는 특히 LG그룹 내 대표적 ‘국제금융통’이었다. 1980년 3월 LG상사 뉴욕지사 국제금융부장으로 발령난 이후부터 1995년 3월까지 무려 15년 동안 외국에서만 일했다. 뉴욕지사 국제금융부장을 시작으로 동남아지역본부장·일본지역본부장을 거쳤다.

연고 없는 이북 출신 해외 진출 활발

이 때문인지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고 두터운 해외 인맥을 자랑한다. 이런 점에서 ‘경제 외교관’으로 유명했던 부친을 꼭 빼닮았다는 것이 그룹 안팎의 평가다. 외국에서 돌아온 구 부회장은 LG투자증권 부사장과 LG전선 사장 등을 역임한 뒤 2003년 11월 LS그룹이 LG그룹에서 독립하면서 LS전선 부회장으로 부임했다.

구 부회장은 팔방미인 기질을 타고났다. 음악·미술 등 예술 감각이 뛰어나고 만능 스포츠맨으로 정평나 있다. 특히 골프·스키·스노보드·산악자전거 실력은 거의 ‘프로 선수’를 뺨친다.

서울지역 최대 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인 C&M커뮤니케이션의 이민주 회장은 최근 기업공개를 앞두고 증권가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으며 세간에 회자하고 있다. 국내외 증권사들은 C&M의 상장 주간사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상장이 이뤄질 경우 추정 시가총액이 1조 원을 넘는 대형 거래이기 때문이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삼성증권·우리투자증권 등 대형 증권사와 외국계 증권사들은 주간사 계약을 따내기 위해 이 회장과의 면담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 회장은 상장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입장이어서 증권사의 애를 태우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최근 유선방송사업자(SO) 매매가격을 고려할 때 C&M의 시가총액이 최고 2조 원에 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C&M은 현재 서울 성북·송파·마포구와 경기도 고양시 등 15개 방송구역에서 가입자 200만 명을 대상으로 케이블TV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C&M 관계자는 “애널리스트들이 C&M 가입자당 가치를 53만 원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100만 원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가입자가 200만 명인 만큼 시가총액은 2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CJ그룹이 지난 4월 부천·김포지역과 은평지역의 드림씨티방송을 인수하면서 가입자당 80만 원을 쳐줬고, GS홈쇼핑은 지난해 말 강남케이블TV를 가입자당 180만 원에 인수했다”며 “C&M의 서비스 지역을 고려할 경우 최소한 가입자당 80만 원은 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C&M이 상장에 적극성을 띠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C&M을 찾았던 한 증권사 임원은 “C&M 측에 상장을 권유했지만 회사 측 태도가 미지근해 일의 진척이 느리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C&M 관계자는 “2004년 골드먼삭스로부터 1,4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할 당시 5년 이내에 기업공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면서 “C&M은 지난해부터 상장 요건을 충족했고 현재 상장 준비를 마쳤지만 주간사 계약 등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말했다.

구자열·이민주·이동건 회장 등 오너급 다수 배출

그는 “상장은 주주들의 생각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상장했을 때 주식가치와 M&A 가치, 국내 상장과 국내외 동시 상장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민주 회장은 특수관계인들과 함께 지난해 말 기준으로 61.17%의 C&M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CEO급 중에서는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서울고 출신 원로 가운데 가장 활동이 왕성한 인물 중 하나다. 현 전 회장은 제주도 섬소년에서 삼성의 CEO에 올라 자신도 “섬 촌놈이 출세했다”고 말할 만큼 입지전적 인생을 살아왔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친 그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이라는 당시로서는 다소 황당한 꿈을 키운다. 가족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내면서 어렵사리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현 전 회장은 당시를 “해군 함정을 타고 목포로 가서 열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은 신기할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서울고는 입학 정원의 10%(30명)만 전국 수험생 중에서 뽑았는데, 현 전 회장은 이 30명에 포함돼 서울고에 입학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객지에서 난방이 안 되는 쪽방생활을 하던 그는 고3 때 폐병에 걸려 넉달간 고향에서 요양하기도 했지만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공부에 열중했다. 고시일 3주 전 부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고시 준비 중인 명관이에게 말하지 말라”고 유언했고, 현 전 회장은 시험이 끝난 뒤에야 임종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콧등이 시큰해진다”고 말한다.

그 이후 어느 날 청년 현명관은 어머니로부터 친구의 딸이 대학시험을 치르러 올라가니 잘 도와주라는 전화를 받는다. 그 어머니 친구의 딸이 바로 현재 아내인 오영자 씨다. 객지생활에서 도움을 주고받던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텄고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현 전 회장은 고시 2차 시험에서 낙방하는 좌절을 맛본다. 그 뒤 결국 고시를 포기한 현 전 회장은 제주 제일고에 독일어 전임강사로 부임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다시 행정고시에 도전해 합격, 부산시청을 거쳐 감사원에서 본격적인 행정업무를 익히게 된다.

13년간의 국가·지방행정 감사 업무를 통해 현 전 회장은 추진력과 판단력을 갈고닦았다. 공무원 시절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던 그에게는 박봉으로 늘 가난이 함께했다. 아내가 구멍가게를 연 시기도 그때였다. 그는 “퇴근 후에는 구멍가게에서 책을 보며 일을 도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더 넓은 세상, 유학을 고민하던 현 전 회장은 청와대 사정부서로부터 근무 제의를 받는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그는 과감하게 유학을 택해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일본 유학생 2호로 이름을 올린다.

일본 유학생활은 힘겨웠다. 아내는 불고깃집에서 일했고, 그는 경품 교환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현 전 회장은 열악한 여건을 딛고 게이오(慶應)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고 감사원에 복귀한 후 삼성 측의 제의로 다시 기업인으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1978년 그의 첫 근무지는 삼성그룹 계열사인 전주제지였다. 관리부장을 맡은 현 전 회장은 공무원 경험을 활용해 업계 최초로 교원공제조합과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의 회사채 인수를 성사시키며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1981년 이사로 승진한 현 전 회장은 신라호텔로 자리를 옮겨 호텔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시키는가 하면 팁을 받지 않는 차별화된 전통을 만들며 호텔을 키워나갔다.

‘제주 촌놈’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도 졸업생

경영인으로 본격 변신한 현 전 회장은 제주신라호텔 건설을 주도해 우여곡절 끝에 국제적 감각을 지닌 리조트 호텔로 완성하면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현 전 회장은 또 1993년 기업 정상화를 위해 삼성건설에 급파돼 주택부문에서 차별화된 아파트를 만들고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초석을 쌓았다.

삼성에서 물러난 그는 지난해 고향인 제주도지사선거에 출마했다 아깝게 낙선한 뒤 요즘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경제 자문단에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 자회사로 홈네트워크 부문 부동의 1위 기업을 지키고 있는 서울통신기술의 송보순 사장도 서울고와 인연이 깊다. 송 사장의 동생들인 송경순 LECG코리아 사장과 송웅순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등도 서울고를 졸업했다.

이들 중 송경순 사장은 MBC 앵커 출신인 백지연 씨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인물. 국제금융 전문가로 세계은행 총재의 자문역을 지내기도 한 그는 (주)두산의 사외이사로 참여하는 등 기업과 금융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송웅순 변호사 역시 경제 관련 분쟁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한국증권법학회 회원으로 증권선물위원회 비상임 위원을 맡기도 했던 그는 특히 금융업체 간의 인수합병(M&A)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서울은행과 하나은행의 합병 등 대부분의 대형 은행 M&A가 그의 손을 거쳤다.

삼성에서 주목받는 또 한 명의 서울고 출신 인사로는 김 석 삼성증권 부사장을 들 수 있다. 투자은행(IB)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삼성의 ‘차기 CEO’ 후보군 중 한 명으로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 그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을 계기로 삼성증권을 ‘한국의 골드먼삭스’로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김 부사장은 최근 두 건의 초대형 IB 거래를 잇달아 성사시키며 한껏 주가를 올리고 있다. 장외시장의 거인인 미래에셋증권의 기업공개(IPO)와 영국·한국에서 동시 상장한 국내 첫 인프라펀드 맥쿼리펀드(MKIF)의 상장이 그것이다.

미래에셋증권 IPO는 펀드 열풍을 주도한 장외시장의 거물을 성공적으로 장내에 안착시킨 성공 사례다. 삼성증권은 국내 IPO 사상 처음으로 수요 예측과 청약에 외국인이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해 양자 모두에게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미래에셋증권은 은행의 핵심 고객을 넘어설 정도인 200만 명 이상의 잠재고객을 보유해 장기 성장 잠재력도 풍부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간 지분 관계가 다소 복잡하고 공모 당시 증시가 조정을 거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증권은 미래에셋증권 수요 예측에 외국 기관이 참여하도록 했고 해외 6개 기관이 실제로 청약에 참여하는 성과를 일궈내 이러한 우려를 걷어냈다.

서울통신기술 송보순 사장 3형제 나란히 졸업

애초 사모펀드를 공모펀드로 전환해 국내외 동시 실시한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MKIF) 상장 및 공모는 시중 부동자금을 SOC 투자재원으로 유치해 자금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프라펀드를 통해 SOC 사업 시행자에게 시설 운영 단계에서 투자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SOC 투자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서울고 출신 CEO 중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도 최근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다. 노 사장은 2002년 9월 그룹 주력 계열사의 분리 과정에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던 회사를 난파의 위기에서 구하라는 임무를 띠고 취임했다. 당시 대북송금 의혹과 경영권 분쟁, 주식시장에서 관리종목 지정 등 현대상선은 잇따른 시련으로 존망조차 위협받았다.

노 사장 취임 4년을 넘긴 현재 현대상선은 그의 취임 때 1조 원이 넘던 단기부채를 모두 갚았다. 2002년 184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현대상선은 노 사장 취임 2년 만인 2004년 창립 이래 사상 최고액인 5,548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2006년에는 부채비율도 200% 밑으로 끌어내렸고, 한때 1,000원 대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2만 원에 육박하고 있다.

미래를 기약하기 힘들었던 현대상선이 건실한 재무구조를 지닌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난 데는 노 사장의 리더십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히 지난 4년간 미래를 대비한 과감한 투자로 중장기적 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해운업의 특성상 반복되는 호황과 불황의 파고를 넘기 위해 주력 부문인 컨테이너사업 외에 유조선사업 같은 유망 분야에 적극 진출했다. 현대상선은 컨테이너선사업부문과 비컨테이너선사업부문의 비중을 6대 4로 조정해 특정 분야의 시황에 구애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

또 지난 몇 년간의 해운 호황기에 현대상선은 불황기에 대비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저비용 고효율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정보기술(IT)사업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영업·운항·관리 등 전 사업부문에 선진화된 IT 시스템을 도입했다.

노 사장은 선박 투자에도 적극 나서 경영압박이 한창이던 2003년 10월 6,8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는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현대상선은 상대적으로 선가가 낮은 시점에 컨테이너선·유조선 등을 잇달아 발주해 2010년까지 20여 척의 컨테이너 선박을 추가로 인수받게 돼 중장기적으로 시장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회사의 화려한 경영성과는 가라앉은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주주와 고객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민 노 사장의 용기와 실천 덕이기도 하다. 그는 취임 후 가장 먼저 임직원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서로 벽을 허물기 위해 ‘호프데이’를 열었다. 각 부서를 돌아다니며 임직원을 직접 만나 격의 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기를 북돋우고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은 경영실적을 발표하거나 중요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편지를 홈페이지에 띄운다. 또 국내외를 넘나들며 전 세계 투자자를 대상으로 IR를 실시하고, 고객과 협력사들을 직접 방문하며 회사의 경영상태를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입사 이후 주로 경영기획실과 구조조정본부에서 근무한 노 사장은 ‘실천하는 전략가’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2003년 8월 영업조직을 둘러보러 떠난 출장길에서 5,500TEU급 컨테이너선 ‘현대하이니스’호에 직접 승선했다. 회사 창립 이후 운항 중인 선박에 승선해 해상직원과 숙식을 함께한 대표이사는 그가 처음이었다.

노 사장은 태풍으로 파도가 높아 선박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작업복을 입고 브리지(조정실)에서부터 기관실까지 샅샅이 살피는 한편 수출입 화물이 하역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해운산업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했다.

또 해상직원들과 대화를 통해 고충을 듣기도 하고 저녁에는 선원들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노 사장은 “해운분야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열 일을 제쳐놓고 배부터 타 봐야겠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겼다”며 “선박 안에서 파도를 헤치고 전속 항해하는 현대상선의 미래를 보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금도 고객이나 투자자를 위해서는 지구 반대편까지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서울고 출신 금융계의 핵은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이다. 서울고 17회 동기동창들은 그를 선이 굵고 성실한 수재로 기억한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옛 한일은행에 잠시 근무하다 고시를 준비해 1년 만에 수석 합격한 일화를 갖고 있다.

‘친구’ 황영기·최장봉 금융권 핵심 인맥

한국투자공사(KIC)의 지휘봉을 잡았던 이강원 전 사장은 21회로, 윤 위원장의 4년 후배다.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LG투자신탁운용 사장, 외환은행장, 굿모닝신한증권 사장 등을 지냈다.

▶ 1. 서울고는 1980년 옛 경희궁 터를 떠나 서초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2. 서울고의 교훈을 새긴 상징물.
3. 김원규 초대 교장의 흉상.

윤 위원장과 이 사장 외에 대표적 서울고 출신 금융인으로는 황영기 우리금융 회장과 최장봉 예금보험공사 사장이 꼽힌다. 황 회장과 최 사장의 인연은 각별하다. 두 사람은 서울고 23회 동기로 모두 서울대(황 회장은 무역학과, 최 사장은 경제학과)를 나왔다.

대학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금융계에서 이력을 쌓으며 우정을 나눠온 막역한 관계.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해 최 사장이 우리금융 지분 79%를 보유한 예보 사장에 취임하면서 대주주와 경영진으로서 ‘감독-피감독’ 관계에 놓여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2005년 우리금융의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부여 과다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황 회장과 최 사장은 정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고교 동문일 뿐 아니라 서울대 동기동창, 그리고 금융계로 이어진 막역한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황 회장은 2005년 초 최 사장이 첫 민간인 출신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임명됐을 때만 해도 “앞으로 주인과 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며 반기는 모습이 역력했고, 최 사장도 황 회장과의 돈독한 관계를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스톡옵션 문제가 두 사람에게 갈등의 불씨를 제공했다. 우리금융 전체 지분의 78.5%나 보유한 예금보험공사가 우리금융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황 회장의 스톡옵션 부여 규모(25만 주)가 많다”며 “15만 주로 깎자”고 제안했음에도 우리금융 측은 지난 2일 이사회를 통해 표대결까지 가는 진통 끝에 황 회장에게 25만 주의 스톡옵션을 주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우리금융은 경영성과와 주식가치 극대화 등을 고려해 25만 주가 적정하다고 한 반면, 대주주인 예보 측은 직원들과의 형평성, 공적자금 투입 은행 등을 이유로 스톡옵션 확대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대주주가 15만 주를 제시했는데도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예보의 입장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황영기 회장의 행보다. 황 회장의 거취에 따라 우리지주 회장이 인사권을 행사하게 돼 있는 광주은행·경남은행 은행장이 누가 될 것인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최근 우리은행이 타행보다 한 발 앞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단행한 것을 주목한다. 황 회장이 다른 은행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은 것은 물론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와도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이런 중대한 사안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고민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연임을 위한 승부수라는 해석이 있는 반면 “또 튄다”는 얘기를 들음으로써 중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황 회장이 그간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받아왔다는 점과 이 문제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최장봉 예금보험공사 사장과 서울고 동기동창이면서도 예보와 계속 갈등을 빚어왔던 황 회장이 연임 대신 정치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다.

이에 대해 우리은행 관계자는 “비정규직 문제는 어차피 추진해야 할 사항을 먼저 결단내린 것뿐이며, 예보와도 담당 부서장이 미리 상의했다. 사전 협의가 불충분했다는 것이지,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럴 사안도 아니다”라며 “황 회장은 정치 쪽에는 아직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은행의 정상화를 본인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유지홍 조흥은행 감사, 현용구 외환은행 상무, 김경홍 한국씨티은행 부행장 등이 은행권에서 활약하는 서울고 인맥이다. 서울고 출신 한 금융계 인사는 “인재들이 서울고에 많이 몰렸던 만큼 금융계 전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증권가에서도 서울고 출신들은 화려한 인맥을 자랑한다. 특히 이들은 ‘서증회’라는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증권맨 출신인 황영기 회장과 이강원 전 사장을 비롯해 유화증권 대주주 일가인 윤경립 사장, 김형진 전 교보투신운용 사장 등이 서증회의 주축이다. 김용규 전 동원증권 부회장은 서증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 밖에 이재동 전 피닉스자산운용 회장, 송승욱 미래에셋파트너스 대표, 이재창 대신투신운용 대표 등도 서증회 멤버다. 금융계는 아니지만 전윤철 전 감사원장도 서증회 멤버로 가입돼 있다. 하지만 모임에서 얼굴을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서증회 관계자의 전언이다.

대통령 신임 두터운 김영주 씨 장관 발탁

최택상 우리투자증권 부사장, 이명훈 증권예탁결제원 예탁본부장, 김강수 한국증권업협회 이사, 이성로 전 굿모닝신한증권 감사, 마동훈 SK증권 상무, 서동원 동양종합금융증권 전무 등도 증권가의 서울고 인맥이다. 한국개발연구원장과 대통령경제수석·금융연구원장을 지낸 박영철 고려대 교수도 서울고 출신 금융계 인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관료 중에서는 현 정부에서 일하는 서울고 출신 경제관료 중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이 가장 두텁다는 김영주 신임 산업자원부 장관을 들 수 있다. 김 장관은 지난해 3월 국무조정실장으로 부임하기 전 2년 가까이 청와대에서 경제정책수석으로 일하며 대통령을 보좌했다.

청와대 386 참모들도 김 내정자의 능력과 진정성에 후한 점수를 준다. 덕분에 지난해 말 개각 때 건설교통부 장관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김 내정자의 이번 발탁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청와대 근무 시절부터 새벽 4시20분에 일어나 종교생활을 하고 오전 7시 전에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고 인맥들은 가끔 단결심이 지나치다는 얘기도 듣는다. 특히 지난해 불거진 외환은행 헐값매각의혹 사건 때는 서울고 출신 인사들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박순풍 엘리어트홀딩스 대표이사 사장, 전용준 외환은행 상무 등이 구속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또 서울고 출신인 이강원 전 한국투자공사 사장도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과 관련한 책임을 지고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서울고등학교는 어떤 학교?

피난 중에도 졸업생 배출한 ‘서울 8학군 대표 주자’

▶ 서울고의 옛 교사가 자리했더 경희궁터

서울고등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고 김원규 교장은 학생들의 교복바지 주머니를 모두 꿰매게 하는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조치를 했는지는 정확히 전하지 않지만, 서울고 동문들은 “어린 학생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게 되면 자연히 잔뜩 웅크린 자세로 걷게 된다.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라면 모름지기 어깨를 펴고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걷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한다.

서울고 동문들은 학교 역사를 말할 때 “1946년에 설립됐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고는 1946년 2월 옛 경희궁 터에 교사를 마련해 12학급 552명의 학생을 선발해 ‘서울중학교’로 개교했다. 하지만 이는 ‘서울고’의 역사에만 한정된 이야기다.

서울고 출신들이 해방 이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 서울 제3고보였던 서울고는 고위층이나 부유한 일본인 등 ‘선택된 자’의 자제들이 주로 다닌 학교였다.

때문에 “항일운동이 일어났다”거나 “민족계몽에 앞장섰다”는 등 다른 학교들이 내세우는 자랑거리가 별로 없다.

▶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한 서울고.

하지만 광복 후 일제가 물러가면서 서울고는 면모를 일신했다. 특히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실향민들의 자제 중 학업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몰리면서 명문고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전쟁 중에는 교명을 ‘서대문중학교’로 바꾸고 부산 보수공원에서 노천수업을 하면서까지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쟁 뒤 서울로 돌아온 서울고는 학교 이름을 원래 이름인 서울중으로 되돌리고, 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을 분리하는 등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서울중학교가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1971년 2월 서울중학교는 총 20회, 8,8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80년에는 경희궁 터를 떠나 서울 서초동에 신축 교사를 지으며 ‘강남 8학군’에 속하게 됨으로써 다시 한번 명문고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고교 평준화 와중에도 꾸준히 명문대 진학생을 배출하며 ‘이름값’을 하고 있다.

서울고의 교훈은 “어디를 가도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라”다. 초대 교장을 지낸 김원규 교장이 남긴 말이다. 이 말은 대형 비석에 새겨져 지금도 서울고 교정 한쪽을 지키고 있다.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 [wh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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