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Leisure] 강추! 나들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동갑내기인 이기호·이화선(38)씨 부부. 평소엔 주위의 부러움을 한껏 사는 ‘닭살’ 커플이지만 이들에게도 ‘아킬레스 건’이 하나 있다. 신혼여행 얘기만 나왔다 하면 이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 그럴만도 한 것이 허니문이라고 기억에 남아있는 게 없다. 물론 신혼여행은 다녀왔다. 24살이던 1989년. 당시 최고 유행이었던 제주도 허니문이었다. 하지만 3박4일 내내 버스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졌다 사진 한 방 찍고 다시 딴 데로 끌려다녔다. 어디가 어딘지는 아직도 흐릿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다시 가는 제주도 허니문. 외아들 준영이(14)는 옆집에 맡기고 회사엔 휴가를 냈다. 마침 지난주가 결혼 14주년 기념일. 신혼여행보다 더 설레는 심정으로 2박3일치 배낭을 꾸렸다.

*** 추억 속으로

11월 하순인데도 섬은 포근하다. 제주공항에서 바로 렌터카를 타고 서귀포로 향했다.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의 배경. 천지연폭포를 향해서다. 99번 국도를 타고 남제주에 이르니 '지삿개'란 이정표가 먼저 나온다. 뭔가 싶어 차를 돌렸다. 14년 전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 때 지삿개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사이 지삿개는 주상절리대란 이름으로 알려져 지금은 제주도 최고의 명소 중 하나가 돼 있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단체 관광객의 행렬이 이를 증명한다. 몰려드는 인파에 밀려났다. 켜켜이 쌓인 돌기둥 사이에 쉼없이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는 절경은 효도관광 나온 노년 부부들의 차지가 됐다. 천지연 폭포다. 애걔~. 신부가 실망하는 소리. 기억으론 엄청 장대하고 우렁찬 폭포였는데. 시중의 물놀이 시설이 덩치는 더 큰 듯하다. 그래도 관광객은 여전히 많다. 폭포 앞 사진 포인트에서 한참을 기다려 찰칵! 기분은 영락없는 허니문이다.

*** 이름을 남기다

특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명색이 '다시 찾은 허니문' 아니냐. 베란다에 나와 바다를 바라본다. 수평선 멀리 오징어 배가 불을 밝히고 있다. 제주도 푸른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아침에 뿌듯한 행사가 있었다. 기념 식수. 허니문 고객에게 제주 신라호텔(1588~1142)이 제공하는 이벤트다. 호텔 앞 정원엔 이미 2백여 그루의 애기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어른 키보다 훨씬 큰 것도 많다. 부부는 정성스레 심었다. 맨손으로 흙을 다지고 또 다졌다. 죽으면 안되지. 언젠가 다시 찾아왔을 때 훌쩍 커버린 나무를 보게 될 생각에 기분이 새롭다. 날짜.이름을 적어 명패를 달았다. 괜스레 진지해졌다.

*** 오름에 오르다

용눈이 오름을 권한 건 렌터카 회사다. 한적한 곳을 찾는다 했더니 추천했다. 지도를 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안개가 워낙 짙었다. 그러다 별안간 나타난 비경. 새파란 당근밭과 감자밭이 확 펼쳐진다. 밭고랑 따라 꼬불꼬불 화산암 돌담이 쳐져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제주의 풍광. 그러나 관광지만 좇다 보면 평생 보지 못하는 비경이다.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다. 수산리 근처 16번 지방도로를 헤매던 사이 용눈이 오름은 어느덧 바로 오른쪽에 와 있었다. 제주엔 3백60개의 오름이 있다. 오름이란 '오르다'의 명사형. 기생화산을 예서 부르는 말이다.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이렇게 불린단다. 경사도 완만하고 높이도 만만해 보여 안개 자욱한 오름에 올랐다. 안개 사이로 소떼가 불쑥 나타났다. 신부, 깜짝 놀란다. 사실 신랑도 적이 놀랐다. 찬찬히 둘러보니 사방이 소 천지다. 오름 아래쪽엔 군데군데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오름은 제주민의 터전이라더니. 안개비가 온몸에 내려앉았다.

***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섬 북동쪽 내륙의 선린지(064-784-8666)란 펜션에서 둘째 밤을 보냈다. 3만평의 휴양림 복판에 들어선 이색 숙소다. 하지만 꼼꼼히 둘러보진 못했다. 성산 일출봉을 보러 새벽에 나왔기 때문이다. 일출봉 초입 들판을 보고서야 여기가 14년 전 "나 잡아봐라"며 둘이 뛰어다녔던 데란 걸 알았다. 물론 가이드가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기억이 새롭다. 정상 일출은 실패했다. 30분 등산이 억울하다.

바로 옆의 섭지코지를 향했다. 섭지코지란 좁은 땅(협지)이란 뜻의 '섭지'와 곶(串)이란 뜻의 '코지'가 합해진 제주 사투리. 솟대바위.억새밭.등대 모두 눈길을 끌지만 무엇보다 절벽을 타고 꽃망울을 터뜨린 야생화들이 그리 고울 수가 없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별거냐 싶다.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 지난 여정이 꿈만 같다. 이제는 누가 신혼여행 얘길 꺼내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제주도에 갔노라고.

제주=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신혼여행 명소 제주도는

제주도 허니문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랑 신부가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주도의 대표 표정이었다. 천지연폭포.만장굴.용두암 등도 당시의 주요 행선지. 대형 전세버스를 타고 스무쌍씩 함께 다녔다. 수학여행 나온 학급 친구처럼 같이 밥먹고, 같은 여관에서 잠을 잤다.

택시기사가 사진사와 가이드까지 1인3역을 도맡은 건 90년대 중반까지의 추세였다. 그때 개발된 코스가 이른바 도깨비도로 드라이브. 11번과 99번 지방도로 상에서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길의 높낮이가 실제로는 정반대라 물을 흘려 보내면 꼭 거꾸로 오르는 듯한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유채밭과 승마장도 당시 필수 사진 포인트였다. 요즘 단체 신혼여행은 거의 없다. 대부분 각자 스케줄을 짜고 숙소를 정하고 렌터카를 이용한다. 요즘 추세라면 외부의 영향을 크게 탄다는 것. 영화.드라마.CF에서 배경으로 '떴다'하면 바로 명소가 된다. 우도.섭지코지.지삿개(주상절리대)와 특급 호텔이 늘어서 있는 중문단지가 요즘 그렇다. 도움말=대장정 여행사(064-711-0476).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