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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우의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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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런 정도의 팬들이라면 가수나 방송사들이 굳이 꺼리거나 피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열린음악회'는 지방 공연 때마다 경호 용역업체에 의뢰해 안전요원 수십 명을 동원한다. 술 취한 방청객이 소동을 부리거나 무대 위에 뛰어오르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작년 경북 상주의 'MBC 가요콘서트' 공연장처럼 대형 참사가 빚어질 소지도 미리 없애야 한다. 프로그램이 비교적 점잖은 덕택인지 지방 공연 때 '어깨'들의 협박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문 PD는 말했다.

그러나 모든 공연이 '열린음악회'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인기 가수 S가 공연하러 부산에 갔다. 공연장에 도착해 보니 조명이나 음향시설이 당초의 계약 내용과 너무 달랐다. "이 상태로는 공연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서울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승한 매니저의 전화 벨이 울렸다. 부산 지역 폭력조직원의 전화였다. 매니저는 사색이 돼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차를 돌렸다. S는 결국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인기 가수가 '부르기 싫은 노래'를 부른 사례는 꽤 많다. 한 가수는 "지방 공연에 갔다가 공연이 끝난 뒤 낯선 나이트클럽에 반강제로 불려가 노래를 부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씁쓸해했다. 물론 지역 폭력배들의 압력 때문이다. 같이 사진을 찍자거나 사인 용지 수백 장을 내놓고 다 채워 놓으라는 협박도 심심치 않게 받는다고 한다. 폭력배들이 열성 팬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요새는 유명 연예인의 사진이나 사인도 다 돈이다. 폭력을 앞세워 초상권을 갈취하는 것은 칼 들이대고 돈을 뜯는 짓과 똑같다. 그래서 경호 용역회사 '강한 친구들'의 채규칠 대표는 "경호 계약을 맺은 연예인이 지방 소도시 공연장에 갈 때는 반드시 비상탈출구부터 점검한다"고 말한다. 여차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연예기획사들이 대형화하고 제대로 된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옛날 같은 노골적인 폭력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인기 배우 권상우씨가 당했다는 "내일부터 피바다가 돼도 상관없다 이거지"라는 섬뜩한 협박을 보면 우리 연예계는 아직 멀었다. 피의자 측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으니까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지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조폭 두목 출신의 전화를 받기만 해도 겁에 질려 기함을 하게 마련 아닌가.

연예인들의 겉과 속을 누구보다 잘 아는 채규칠 대표는 "권상우씨가 정말 대단한 용기를 냈다.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비슷한 일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권상우씨가 주연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생각난다. 고교 선도부장 종훈은 자신의 주먹 실력과 학교 측의 비호를 등에 업고 학우들에게 행패를 일삼는다. 참다 못한 주인공 현수(권상우)가 몸을 단련하고 쌍절곤을 익혀 마침내 옥상에서 종훈의 패거리와 한판 겨룬다. 통쾌하게 승리한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며 외친다. "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

연예계의 다른 수많은 권상우를 위해서도 권상우씨의 용기는 참 대견하다.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사법 당국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한심하다. 그래서 권씨가 '말죽거리 잔혹사'의 욕설 섞인 대사를 다시 한번 외친다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대한민국 경찰.검찰, ×까라 그래!"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