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떠난 자나 남은 자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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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열린우리당의 집단 탈당은 일종의 방화(放火) 사건이다. 명분도 없고 무책임한 탈당자들은 동료들을 뿌리치고 드디어 불을 냈다. 자신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했지만 정치권에는 연기가 가득하다. 국정의 길이 잘 보이지 않고 유권자는 눈이 따갑다. 방화그룹 23명에는 직전까지 원내대표.정책위의장을 지낸 이와 개혁을 외쳤던 이들이 잔뜩 들어 있다. 국민은 떠난 자냐 남아 있는 자냐를 불문하고 이 정권이 저지른 지난 4년간 과오의 책임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탈당자들은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국민 통합 신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3년여 전 그들이 버렸던 민주당의 구호였으며, 그들이 만든 열린우리당의 구호 아니던가. 그들은 또 참신한 인사를 영입하겠다고 한다. 수차례의 철새 짓으로 이미 자신들이 헌 집단이 됐는데 새 얼굴이 들어온들 새 당이 될까. 그들은 "허허벌판으로 나간다"고도 했다. 20여 명의 인원으로 수개월 내에 정당을 만들면 수십억원의 국고보조금을 타낼 수 있는데 어디가 허허벌판이란 말인가.

집권 여당이 제1야당보다 20석 가까이나 부족한 제2당으로 전락했다. 국회에는 중요한 입법 과제가 쌓여 있다. 민간 아파트 원가공개를 포함한 부동산법, 출자총액제한법 개편안, 사학법 재개정안, 국민연금 개혁안, 사법개혁안, 방통융합안 등이 신속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탈당자들은 열린우리당과 차별화될 수 있는 중도개혁 노선을 걷겠다고 한다. 이들이 부동산법.출총제 등에서 여당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면 한나라당과 함께 간다는 것인지 그 노선조차 알 수 없다. 당장 공무원들이 열린우리당과의 당정 협의만 믿고 앉아있을 수는 없게 됐다. 국정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혼돈이다.

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되나. 소속 의원들이 떼를 지어 떠나가고 있으니 왜 이 지경이 됐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렇다고 집권당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법안을 위해 탈당자들을 설득하든지, 아니면 한나라당과 진솔한 협상을 벌이든지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사학법 같은 경우엔 당이 고집을 부릴 처지가 아님을 인정하고 건전 사학의 의견을 대폭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개정에 임해야 한다.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한나라당은 이제 제1당이 됐다. 그만큼 국정운영의 책임 몫이 커진 것이다. 당은 9일 열릴 영수회담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새로운 상황에 맞는 국정 견제.협력의 큰 틀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여당 붕괴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책임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붙어 있는 한 무조건 안 된다며 떠난 이가 많다. 여당이 100여 석으로 위축됐고, 그 당조차 개헌에 별 열의가 없는데도 대통령은 개헌을 발의하겠다며 일을 벌이고 있다. 정부의 개헌지원단은 되지도 않을 일에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여당의 제2당 추락은 개헌 발의 동력조차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상황에 솔직해지라. 발의를 포기하라. 체면보다는 현실을 과감히 수용하는 게 대통령의 특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