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신영균 고교졸업후 유랑극단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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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영균(1928년생)-고교때 연극하던 그는 졸업과 더불어 청춘극장이라는 극단에 배우로 들어간다. 고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가 직업극단에 직업배우로 들어간다는 것은 배우로서의 소질이 그만큼 빨리 나타났다는 얘기가 될까. 2년간 유랑극단 단원생활을 하며 해방직후의 전국을 누빈다.
그 당시는 무대장치용 세트를 트럭위에 가득히 싣고 다시 그 위에 단원들이 타고는 엄동설한 삭풍속에 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웅크리고들 있었다. 요새는 파카니 스웨터니 좋은 방한복들이 있지만 그 당시는 내복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국도 역시 요새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되어있지만 그 당시는 끊임없이 차가 덜컹거려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단원들의 가족들도 어린애들까지를 포함해 트럭위에 함께 타고 정처(?)없이 이 거리 저 거리로 이동하고는 했었다.
언젠가 대전에서 대구로 가고 있었는데 트럭위의 세트 더미가 기우뚱하더니 차가 전복해 길가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깊은 계곡은 아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신영균은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생활의 위협을 받지 않는 가장 확실한 직업은 뭣이냐? 그래서 서울대치과학에 입학한다. 그래도 연극은 잊지 못해 치대서 연극하다 서울대 치대의 연극부에 가입한다. 그때의 동료로 이낙훈이 있었다.
치대 졸업후에는 해군군의관으로 들어가 4년후 해군대위로 제대한 다음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 당시 환자로는 변기종·허장강·윤일봉등이 있었데 이들은 올때마다 다시 연극을 하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장민호가 단장이던 국립극단의 박종화원작『여인천하』에 출연한다. 이때 영화평론가 허백년이 와서 이 연극을 보고 제작자 정화세, 감독 조긍하에게 신영균을 지켜보라고 추천했다. 연극을 보고 난 이들은 신영균에게 영화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신영균은 고심 끝에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여인천하』의 영화화 계획이 진행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계획은 무산돼버리고 대신 황순원원작의『과부』(60년·조긍장감독)가『여인천하』스태프가 대거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다. 여기서는 머리를 깎고 이민자의 상대역으로 출연, 예상 밖의 호평을 받는다. 이것이 신영균이 영화배우가 된 경로다. 이때 신영균의 이미지는 굉장히 신선했다.
그후 신영균은 이강천의『정부』, 강대진의『마부』에 계속 출연하는데 이상하게도 처음 세 작품이 모두「부」자 돌림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한다.
그럭저럭하는 가운데 신영균이 요지부동의 톱 스타로 군림하게 되는 것은『연산군』(61년·신상옥감독)에서 연산군으로 주역을 하고 나서 부터였다. 한꺼번에 15편의 영화 출연교섭이 밀어닥쳤고 지방흥행사들은 신영균이라야 장사가 된다고 아우성이었다.『연산군』은 순식간에 그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다주었다.
김승호·최무룡을 비롯한 당시의 일류 배우들이 연산군역을 탐내고 있었다.
신상옥은 자기가 제작한『의적 일지매』(61년·장일호감독)에 출연한 신영균을 보고 연산군역은 신영균이라야 한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속초에서『어부들』(61년·강대진감독)을 촬영하고 있을 때 『연산군』대본을 받은 신영균은 대사 외기에 여념이 없었다. 같이 출연하고 있던 김승호가 그것을 보고『동시녹음도 아닌데 그걸 외면 뭘해…』했다. 그러나 신영균은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우선 대사부터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연극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한 노력이 주효했는지『연산군』은 폭발적인 인기였다.
그후 신영균은 톱스타의 길을 질주 또 질주, 출연작이 물경 5백여편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어느덧 영화계 최대의 재벌이 되었다.
지금 그의 이력을 죽 훑어볼 때 그는 배우이기 전에 하나의 아주 단단한 생활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영화계에선 신영균이 별로 인기가 없다. 인기가 별로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악평조차 있다. 영화계에서 성공했으면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환원하는 것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악평의 원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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