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의 효율성 따지자/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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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지간한 운전실력을 갖춘 사람도 서울에서는 끝없는 장애물 경주를 해야 한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폭군 자동차를 비켜가야하고 돌출물에 부닥쳐 식은 땀을 흘리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도로공사장 부근에는 반드시 「4백m 전방 공사중」같은 표지판이 설치되어있다. 현장에 가까울수록 「2백m 전방」, 그리고 이어 「1백m 전방 공사중」이라는 안내판이 또 나타난다. 아무리 초보운전자라 하더라도 충분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공사장을 지나갈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갖는다.
서울의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몇백 m 전방에서의 사전 안내란게 없다. 공사현장 바로 1m 앞에 세워진 「공사중」이라는 간판은 사실상 달리는 자동차와 충돌시험을 하기 위해 내놓은 장애물이나 다름없다.
아스팔트길 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맨홀에 부닥쳐 혼쭐이 난 운전자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그 충격에 허리를 삐걱했다.
그는 너무 화가난 나머지 사고 위험을 방치하고 있는 서울시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벼르고 있다.
당장 끝낼 수도 없는 자질구레한 공사가 여러군데에서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당국의 「위해」사업을 탓하는 사람도 없고 안전요원을 배치하라는 소비자단체도 없다. 그런데도 「시민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업」은 금년도 서울시의 주요 실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게 될지 모른다.
요즘 경제기획원 관리들은 삼복더위에 내년도 예산을 짜는데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만큼 정부가 국가예산을 어떻게 자르고 붙여 각종 사업의 틀을 갖출 것인가에 일반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치권의 힘의 역할에 의해 예산을 우물쩍주물쩍해도 안된다는 경계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예산은 국민으로부터 거둔 세금을 가장 값있게 쓰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도록 편성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 가계도,기업도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판단때문이다.
작년에 정부는 매년 50만명의 인구가 빠져나가는 농촌문제를 근원적으로 다루기 위해 농업구조개선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짜여진 올해 농림수산부문 예산은 국가전체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농림수산부문 예산의 비목을 뜯어보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돈이 농어가의 빚부담을 덜어주거나 소득을 받쳐주는데 쓰여지고 있다. 예산으로 농어민의 빚을 덜어줄것인가,아니면 그 돈으로 새로운 소득원을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데 쓸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나 여야는 에산의 효율성을 묵살한채 전자를 택했다. 선거구민을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지금 농촌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농가부담 경감액이나 양특적자 보전액은 더욱 커져 배보다 큰 배꼽꼴이 될지 모른다.
당시 그 결정에 참여했던 한 고위관리는 가난한 어부에게 생선을 사주느니 고기잡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임을 미쳐 깨닫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지난 87년 현재의 노태우 대통령과 3인의 대통령후보들은 많은 공약을 쏟아냈다. 일부는 실현 가능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감당못할 약속이었다. 세금은 줄이겠다면서 대역사를 펴겠다는 후보도 있었다.
6공은 출범후 2백만호 주택건설을 추진하고 대전 세계박람회의 국제공인까지 얻었다. 너무나도 거창한 이 2개의 사업은 밖에 알려지지 않은 집권층 내부의 격렬한 논쟁이 한두차례 거쳤으나 더이상 이의제기는 없었다.
6공점수를 올리는 프로젝트에 토를 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도시에서 부실공사 사고가 터졌다.
모두가 다 대역사의 큰 덩어리만을 이야기했지,이 덩어리를 굴리기 위한 작은 일들은 챙기지 않았다. 엄청난 집을 짓기 위해 인력 문제가 어떤지,시멘트 수급이 잘 될 것인지가 조사·분석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실공사가 문제가 돼 정부체통이 말이 아니게 됐다.
5공은 여기저기서 6백61억원의 성금을 거둬 평화의 댐을 만든다고 했다가 87년에 공사를 중단했다. 그 돈이 왜 그렇게 「낭비」 됐는가 하는 논의도 묻혔다. 작년에 토지초과이득세를 도입할때 그게 건축경기에 어떤 영향이 미칠 것인지 사전평가가 전혀 없었다. 도로운전시 목표만 정했을뿐 어디에 돌출 장애물이 있는지 아무도 파악하려 들지 않은거나 마찬가지다. 그런판에 친절한 차량안내는 기대할 수 없다.
정부가 내년 예산편성에서 공약사업을 어느 정도 반영할 것인지 아직은 미지수다. 그러나 이제 긴급히 결정해야 할일이 있다. 공약사업중에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느냐다. 이것 저것 모두 다 하겠다고 서두른다면 국민의 세금을 함부로 쓴데 대한 엄청난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6공말기는 취사선택의 철학이 필요하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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