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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엔 반일 … 가서 본 뒤 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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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만이 아닌 다양한 일본의 모습을 살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무조건적인 반일(反日)이 아니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본을 잘 파악하면서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민은기.한영외고3)

"한국 입장에서 과거의 피해를 의식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보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떼어놓고 봐선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노민혜.전주 상산고2)

막연했던 '반일(反日) 감정'은 현장체험을 통해 '지일(知日) 다짐'으로 바뀌었다. '한국사 지킴이'를 자임하고 일본 탐방을 하고 온 제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하 역시.歷試) 성적 우수자들의 이야기다.

제1회 '역시'에서 등급별 만점을 받은 학생 등 30명으로 구성된 해외역사탐방단이 1월 27일부터 31일까지 일본 규슈(九州) 지역을 답사했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1607년 세운 구마모토성. 올해 축성 400주년을 맞았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 답사는 후쿠오카~사가~구마모토~가고시마로 이어졌다. 가고시마는 한국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의 발상지로 손꼽히는 곳. 대표적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이다. 사가에는 임진왜란 때 출병 거점으로 만든 나고야성도 남아 있다.

규슈 탐방을 통해 '일본의 두 얼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첫 방문지인 나고야성의 박물관은 한.일 문화교류를 염원하는 평화의 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자살 공격대'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가고시마의 특공평화회관에는 일본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감추려해도 감춰지지 않는 섬찟한 공격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본과 일본인의 다면성=규슈 지역은 한.일 역사 왜곡과 갈등의 쟁점 지역임에도 이 지역은 표면적으로 매우 친(親)한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내판과 거리의 지명, 관광지의 안내문구 등을 모두 한글로 표기했다. 거리는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나고야성 박물관이 압권이었다. 역사 왜곡 설명을 연상하고 들어간 이들 앞에는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침략 사실과 한국인이 받은 고통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은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드러난 모습으로는 '한.일 문화교류의 징검다리'로 보였다.

후쿠오카에서 만난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소장 이나바 쓰기오(60) 교수는 일본의 극우 성향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에 대해 "극소수의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며 "일본 교육계는 아직까지 양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가고시마 남단에 위치한 가미카제 특공평화회관에는 일본인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전투기 한 대에 몸을 싣고 불나방처럼 미군 전함에 날아든 '자살 공격대'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곳이다. 특공대원 전사자들의 사진이 전시관을 메웠다. 그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게 하지 않기 위해 기념관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특공'과'평화'라는 이질적 용어를 조합시킨 데서 일본의 양면성이 드러나 있었다. 1036명의 특공대원 가운데 11명의 조선인 이름도 보였다.

◆역사의 상처 되돌아보기=일본 속 한국 문화의 자취는 규슈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과거로의 여행은 삼국시대-조선시대-일제 강점기의 한.일 관계사를 짧은 시간에 두루 훑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과 유사한 유물이 나온 바 있는 후나야마 고분군에서는 한.일 고고학계 간 쟁점 사항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쪽의 사각형 무덤과 뒤쪽 원형 무덤이 결합된 형태)의 존재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전쟁이 끝난 후 1607년 세운 구마모토성은 올해 축성 400주년을 기념하는 광고 문구가 화려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기념행사였지만 우리에겐 아픈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편 가고시마현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가 조선 도자기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한 심수관 도예지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수장돼 있다는 구시다 신사 등 한국 문화의 흔적을 찾는 일은 아픈 우리 역사의 상처를 들춰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충남 태안여중 박정희(46) 교사는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 일방적 사고가 아닌 쌍방향의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며 "더 많은 사람이 '역시'를 통해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키울 수 있도록 제도화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후쿠오카.가고시마=배영대 기자

제1회 역시 해외역사탐방 참가자 명단(성적 우수자와 인솔 교사)

■ 성적 우수자=민은기 한영외고 3년, 이정민 예비대학생, 노민혜 전주 상산고 2년,

오창우 경기 효명중 3년, 조지현 충남 태안여중 2년, 강기현 대구 용호초등 5년,

이태호 서울 수락초등 5년, 김양래 경기 평동초등 6년, 최영오 일반인, 조득희 경기 수리초등 6년

■ 인솔 교사= 백준기 전주 상산고, 박정희 충남 태안여중, 남선이 대구 용호초등

황기봉 서울 수락초등, 유화성 경기 평동초등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역시)='역시(歷試)'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대해 중앙일보가 붙인 별칭이다. 밖으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진행되고 안에선 각종 시험에서 한국사 과목이 소외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이면 꼭 알아야 할 한국사 기본지식을 널리 보급하자는 취지로 도입했다. 제1회 시험은 2006년 11월 열렸다. 첫 시험에서는 3.4.5.6급만 실시했다. 올해 5월로 예정된 제2회 역시에서는 대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고급단계인 1.2급 시험도 실시한다. 홈페이지 www.historyexa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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