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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거부 충돌] 총선 기선잡기…국민만 골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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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간에 전면전이 시작됐다. 盧대통령은 25일 측근 비리 특검법안을 거부, 다시 국회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검찰의 수사권을 국회 다수당의 횡포에서 보호한다는 이유를 댔다. 거야(巨野) 한나라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한나라당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남용한 독재적 행태" "국가 지도자 자격을 포기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지도부는 장외투쟁, 국회 등원 거부, 의원직 총사퇴, 盧대통령 하야 운동 같은 초강경 투쟁 전략을 다듬고 있다.

청와대와 거야의 정면 충돌은 현재로선 출구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양쪽 모두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4개월 앞으로 다가온 17대 총선이란 정치 일정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힘 겨루기를 총선 승리냐 패배냐를 좌우하는 시험대로 인식하고 있다. 이 와중에 피해를 보는 쪽은 역시 민생이다. 파행 장기화는 국정 파탄과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안 거부라는 카드를 밀어붙였다. 정확히는 특검법안에 대한 선(先)거부→검찰 수사 완료 및 국회의 특검법 재의결→특검실시 및 재신임 처리가 盧대통령 구상의 골자다. 조건부 거부인 셈이다. 만약 특검법안에 대한 국회 재의결이 무산될 경우 盧대통령은 정부라도 새 특검법안을 내겠다고 했다. 이는 측근 비리에 대한 진상규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재신임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당의 반발이 누그러들지는 않고 있다. 이날 盧대통령이 정국을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선택을 불사한 것은 특검법안을 수용하더라도 한나라당이 공세를 늦추지 않을 것이란 불신 때문이다. 盧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그동안 국회를 존중해 왔는데 한나라당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걸핏하면 탄핵을 들먹이고 마침내 장외 투쟁까지 선언하고 나섰는데, 이것은 협박"이라고도 했다.

거부권 행사엔 총선에 대한 고려도 담긴 것 같다. 청와대는 지난 정부에서 '옷 로비 특검'이 당시 여권에 총선 악재로 작용했다는 점을 의식했다고 한다. "특검법을 수용하면 청와대 사람들이 매일 같이 불려나가 포토라인에 서고, 의혹은 계속 제기되고, 정치공세는 내내 이어질 것이고, (진실은) 총선 이후에나 나올 것"(李鎬喆 민정1비서관)이라는 것이다.

특검법안 국회 재의결 전망이 불투명해진 점도 盧대통령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미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재의결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盧대통령의 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특검법안은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여권의 판단이다. 盧대통령은 재의결 무산시 정부 입법으로라도 특검법을 새로 제출하겠다고 했으나 현재로선 논란만 이어지다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盧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특검법안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특검법안 국회 통과 때와는 정국이 달라져 재의결 여부를 놓고 야3당 간에 논란을 벌인 것도 여권으로선 상황 변화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특히 한나라당의 강경 투쟁 노선이 여론의 역풍을 부를 경우 총선에서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권은 믿는 것 같다.

그러나 盧대통령 또한 마주 달리다 먼저 피하는 쪽이 패하는 '치킨 게임'식으로 정국을 운용하는 데 대한 여론의 부담을 짊어진 상태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의식한 듯 "조건부 거부는 곧 조건부 수용"(鄭東采 홍보위원장)이라며 정국 파행의 원인을 여권이 제공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회와의 정면 충돌을 자초한 데 따른 '오기 정치'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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