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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쉼] 소중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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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린에 당도하기 전에 산중에서 만나게 되는 철십자가. 사람들은 그 주위에 돌멩이를 쌓기도 하고 소원을 비는 쪽지를 끼워놓기도 한다. 원래 오래된 아주 고풍스러운 십자가가 있었는데, 그 십자가는 철거되고 새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날 그 빗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전직 기자도 아닌

그저 '서명숙'이라는 한 인간이었다

녹록지 않은 순례길을 끝까지 함께해 준 어여쁜 길동무들.

산티아고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 사이에는 부상자가 늘어났다. 알베르게는 종합병원을 연상케 했다. 열 발가락 모두에 물집이 잡힌 사람, 근육이 파열된 사람, 인대가 늘어난 사람, 잦은 설사에 시달리는 사람, 오랜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 등등.

순례길에 오르면서 스스로에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정성을 다해 몸을 돌보고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하겠다고. 가장 소중히 여기고 맨 먼저 돌봐야 할 것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학대까지 했던 전반전을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후반전을 제대로 뛰기 위해서는 더더욱.

매일 밤 침낭 안에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석구석 마사지하면서 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참 수고했다, 사랑한다, 내일도 부탁한다." 배낭여행의 원조 한비야씨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걸으면서 단련하고 자기 전에 돌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내 몸은 상한 데,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레온을 지나 대평원을 완전히 벗어날 즈음에는 몸은 장기 레이스에 익숙한 '순례자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 가난한 순례자, 최고의 성찬을 허락받다

몸의 전환이 이루어질 즈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길'에 대한 확신도 어느 정도 생겼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시간을 오후 2~3시에서, 3~4시로, 다시 5~6시로 조금씩 늦추었다. 길을 많이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포도주가 숙성하는 계절이 따로 있듯이 생각도 익어가는 시간이 따로 있는 걸까. 이글거리던 태양이 물러가고 사물이 수굿하게 고개를 숙이고 짐승들도 제 우리로 돌아갈 무렵, 홀로 길을 걷는 것은 그 자체가 행선(行禪)이요, 묵상이요, 기도였다. 해질녘은 자신에게 말 걸기에도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엔 조금 멀고 눈앞의 마을에 들어가기엔 다소 이르다 싶을 때는 풀밭에 앉아 그리운 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때로는 짧은 그림엽서, 때로는 아주 긴 편지를.

'타바코'(담배가게)에서 고심하면서 고른 엽서에, 무슨 말부터 쓸까 긴긴 시간을 들여 편지를 쓰고 나서, 행여 떨어질세라 침을 잔뜩 묻혀서 우표를 붙인 뒤, 배낭에 며칠씩 간직했다가, 어쩌다 발견한 노란 우체통(빨강이 아니라 노랑이라서 한동안 눈앞에 두고서도 애를 먹었다)에 조심조심 떨어뜨리는 그 아날로그적인 맛이란! 청마(靑馬.고 유치환 선생의 아호)가 우체국 창가를 좋아했던 이유를 새삼 깨닫는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먹는 패턴도 달라졌다. 덧창까지 꼭꼭 닫은 어두컴컴한 바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햇빛을 차단하려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보다는 찬란한 햇살 아래 '풀밭 위의 식사'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옆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그늘이 시원해 뵈는 둔덕에 식탁보 겸용 치마를 깔고서 평소처럼 바게트 샌드위치를 준비하는데 한가닥 아쉬움이 들었다. 참치 통조림과 토마토는 있는데 야채만 없었기에. 근데 이게 웬 떡? 아니, 웬 양상추? 둔덕 아래 텃밭에서 자라는 속살 연한 양상추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마침 앞치마 두른 아주머니가 지나가기에 양상추의 주인을 물어봤더니, 자기가 심은 거라면서 한 움큼 뜯어주는 게 아닌가. 샌드위치의 필요충분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지는 순간이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몸을 뒤채는 시냇물과 물가에 심긴 푸른 나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생애 최고의 샌드위치를 조금씩 떼어서, 천천히 음미했다. 사막의 도시 두바이에 세워진 7성급 호텔의 전망,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 이보다 더 멋지고 맛있을쏘냐. 마음 가득한 행복이 바깥으로 흘러넘쳤던 걸까. 지나가던 차들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길 가던 순례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알렉산더 폰 쇤베르크는 저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에서 가난해지는 그 순간 맘만 먹으면 우아하게 사는 길이 열리지만, 부자들은 부의 천박한 속성 때문에라도 우아해지기 힘들다고 역설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가난하기에 우아한 삶이 가능하다는 역설을 입증하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그중 하나가 소음과 간판과 불빛이다.

한계령을 빼닮은 산중마을 만하린(Manjarin), 인적이 드문 산마루에서 마주친 이탈리아 출신 순례자가 말했다. "정말 완벽하게 조용한 곳이다. 고요는 자연이 준 귀한 선물이니 충분히 즐겨라. 그 고요를 마음에 담고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

생각하면 눈물 나는 어머니 같은 산, 라디오 볼륨을 잔뜩 높인 등산객 등쌀에 시달리는 북한산에 이 고요를 부려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 백골의 공포 속에 한가위 보름달을 맞다

강화된 체력을 믿고 걷는 시간을 늘리다가 졸경을 치르기도 했다. 추석 전날이었다.

오후 두어시쯤, 마을을 지나는데 여자들이 알베르게 문 앞에 주저앉아 느긋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순례 초반에 며칠간 같이 걸었던 한국 여자 K와 M이었다. 날이 날인지라 조금만 걷고 알베르게에서 일본 사람들이랑 맛난 음식을 해먹기로 했단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몸이 원하는 건 달랐다. 애걔, 요만큼 걷고 멈추자고?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고 하늘은 저리도 높은데? 먹어봐야 살만 찌는 음식보다야 맑은 공기 마시는 게 몸에 이롭지(소문난 먹보 아줌마의 놀라운 변신!). 조금 더 걷자니까.

아쉬움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다음 마을로 막 들어서려는데, 한 남자가 산티아고 기념품을 좌판에 늘어놓고 판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 마을에서 자고 가라. 다음 마을엔 알베르게가 없다"(물론 손짓 발짓으로)고 일러준다. 알베르게와 손님 유치 계약을 맺었나?(한국 사람다운 의심!) 책에는 그 마을 알베르게가 연중 내내 문을 연다고 적혀 있는데.

충고를 무시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목표한 마을에 닿은 건 오후 6시가 다 돼서였다. 한데, 알베르게가 정말 문을 닫았다. 다음 마을은 7㎞ 더 가야 한다. 인가가 몇 채 있으니 재워달라고 사정해 볼까, 조금 늦었지만 '빡세게' 걸을까. 걷는 쪽을 택했다. 아직은 견딜 만한 다리와 좋은 날씨만 믿고.

텅빈 아스팔트길을 혼자 걷노라니 어느덧 석양녘. 산티아고 여정 중 최고의 노을이었다. 태양은 거대한 비늘구름의 호위 아래 붉고 긴 옷자락을 이끌면서 우아하게 퇴장했다. 유혹을 뿌리치고 길 떠난 순례자에게 대자연이 허락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가도 가도 마을은 안 보이고, 길은 적막과 어둠에 두껍게 포위되었다. 대평원에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불렀던 노래도 나오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길이 끊어지고 좁은 산길이 나타났다. 낮에라면 그지없이 정겨웠을, 완만한 오르막길. 먼 나라에서 컴컴한 산중을 혼자 걷자니 두렵고 떨렸다.

이윽고 보름달이 떴다. 바로 그때였다. 길섶에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뼈를 본 것은(무슨 뼈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공포와 피로와 굶주림이 한꺼번에 덮쳐와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깨지고, 벌벌 기다시피 산길을 벗어났다.

아스팔트길이 다시 열리고, 아련히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흙과 땀에 뒤범벅된 얼굴로 알베르게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쉬던 순례자들이 입을 딱 벌렸다. 나중에 듣자니 꾀죄죄한 행색보다는 내가 들어선 시각에 놀랐단다. 그때가 밤 9시였다.

# 핏줄기를 타고 넘치는 자유여, 기쁨이여

악몽 같은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10월 11일 아침. 해발 1300m의 알토 데 폴로(Alto de polo)에서 하룻밤 묵고 산장을 나서려는데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바 안의 페치카 앞에서 불을 쬐는 순례자들은 한결같이 난감한 표정이다. 한 여자가 배낭만이라도 택시로 보내버리자고 제안했다. 결국 여섯 명이 5유로씩 거둬(택시를 대절하는 삯은 30유로) 15㎞ 떨어진 트리아카스텔라의 알베르게로 배낭을 부치기로 했다.

배낭마저 떠나보내고 안개비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처량해 보였다. 배낭이 없으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한달 만에 배낭은 내 몸의 일부가 돼버린 걸까. 왠지 어깨가 허전하고, 마음도 헛헛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빗발이 가늘어지니 후회가 밀려든다. 트리야카스텔라까지 무사히 도착해 나를 기다릴까, 만일에 대비해 카메라나 노트는 빼놓을 걸 그랬나?

추위도 잊을 겸 걱정도 잊을 겸, 배낭도 없는 터에 뛰기로 결심했다.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할 때 회사 마라톤 대회에 두 번 참가했더랬다. 그때처럼 5㎞만 뛰자.

슬슬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한달 동안 5㎏쯤 몸무게가 줄었는데 그 영향 덕분일까, 몸이 날 듯 가벼웠다. 한라산 5.16도로를 꼭 닮은, 지그재그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걷는 순례자를 하나 둘, 따라잡았다. 일부러 욕심내지 않았으나 절로 그렇게 되었다.

비에 씻겨내린 순정한 초록으로 뒤덮인 산. 그 산을 내달리면서 무언가 핏줄기를 타고 흘러넘쳤다. 자유, 였다. 기쁨, 이었다.

그날 그 빗속에서 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전직 기자도 아닌 그저 '서명숙'이라는 한 인간.

이제 그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dailymark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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