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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안한 안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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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유럽 민주화혁명은 유럽에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신질서를 세우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
동유럽블록의 상징인 바르샤바조약기구와 동유럽경제상호원조협의회(코메콘) 두 기둥이 한꺼번에 넘어지고 억압의 수단이었던 소련군이 동유럽을 떠나고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약50㎞ 떨어진 미로비체. 한때 소련군병력 2만여명이 주둔했던 체코 내 최대소련군기지였던 이곳은 이제 적막에 싸여있다.
미로비체에 소련군이 들어온 것은 지난 68년8월. 「프라하의 봄」당시 체코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농촌이었던 미로비체는 그후 소련군 탱크부대·SS20미사일부대 등이 주둔하는 중무장 군사기지로 변했다. 울창한 삼림과 넓은 초원은 소련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됐다.
그로부터 23년, 이제 소련군이 머물렀던 기지는 텅빈 막사·군사령부·지하벙커 등이 금방 유령이라도 튀어 나올 듯 을씨년스럽다.
기지주변에 사는 스탄다 두르카넥씨(35)는 지난 4월 소련군 철수작업도중 대형폭발사고가 발생, 병사 1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고 전해준다.
두르카넥씨는 그러나 소련군이 떠난 것은 잘된 일이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환경오염을 원상 회복하는 것이 큰일이라고 걱정이다.

<소로부터 완전해방>
특히 이 지역 수질오염문제는 아주 심각해서 지하수는 이미 음료수 사용불가판정이 내려졌다. 소련군이 탱크연료로 사용하고 남은 벤젠폐유를 마구 버려 땅속 깊숙이 스며듦으로써 지하수를 오염시킨 것이다.
소련군이 일으킨 환경오염문제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 그리고 구동독이 당면한 큰 문제중 하나. 이 때문에 소련군측과 각국 정부사이에 보상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계속중이다.
동유럽주둔 소련군철수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소련이 동유럽각국과 철수협정을 맺으면서부터. 지난달을 끝으로 체코·헝가리에 주둔했던 12만3천 병력이 완전 철수했으며, 오는 94년 말까지 구동독·폴란드에 주둔한 43만명(폴란드 5만·구동독38만)도 모두 떠난다.
지난 1일 바르샤바조약기구가 36년만에 완전 해체됐다.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정치위원회 마지막 회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평화적 해체를 의결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8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코메콘 집행위원회도 코메콘 해체를 결의, 42년만에 그 수명을 다했다.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이 거의 동시에 해체된 것은 동유럽블록의 완전해체인 동시에 동유럽국가들의 「소련으로부터 완전해방」을 뜻한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서방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사회주의권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동맹국을 억압해왔다. 56년 헝가리사태와 68년 체코 자유화운동 당시 바르샤바조약군은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동맹국에 침입, 자유화의 싹을 잘랐다.
헝가리 외무부 야노슈 헤르만 대변인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외부세력으로부터 동맹국을 지키기 위한 안보장치라기보다 오히려 동맹국을 탄압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지적하고, 헝가리와 체코는 그 역사적 희생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코메콘 역시 마찬가지다. 소련은 코메콘 가맹국간 분업체제 확립과 무역확대라는 당초 목표와는 달리 동유럽에 경제적 합리성을 무시한 인위적 분업체제, 왜곡된 산업구조를 강요함으로써 경제적 파탄에 빠지도록 했다.
그러나 양대 기구 해체, 소련으로부터의 해방이 동유럽국가들에 반드시 반가운 소식만은 아니다. 40년 가까이 유지돼온 동유럽블록이 하루아침에 무너짐으로써 그들이 볼 피해·부작용은 해방의 기쁨을 능가할지 모른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대통령은 최근 연설에서 동유럽이 사회주의블록이란 질곡에서 우선 벗어나긴 했으나 앞으로 「혼란과 절망의 지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안보상 공백상태다. 폴란드 외무부의 한 관리는 동유럽은 이제 안보상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공산이 됐다고 우려한다.

<「절망의 지역」우려>
동유럽국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소련 국내상황. 미하일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끄는 개혁작업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파들이 득세, 동유럽에 대한 기득권 회복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소련 경제상황이 악화돼 수백, 수천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 올 경우 동유럽 국가들은 파국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고려해야할 것은 동유럽국가들의 군사력 저하. 지난해 미소간에 조인된 유럽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에 따라 동유럽 각국은 군사력을 크게 줄이도록 돼있다. 예를 들어 체코는 총4천5백대 탱크 중 70%를 폐기하도록 돼있다.
뿐만아니라 경제난으로 군사비를 대폭 삭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유럽 국가들은 오는94년까지 군사비를 현재 수준에서 25%이상 삭감할 예정이다.
다음은 경제적 피해. 동유럽국가들은 코메콘 해체로 금년도 대소수출이 20∼50% 감소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에너지가격 앙등으로 산업은 물론 서민생활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소련은 대동유럽 원유공급을 89년 5천6백만t에서 지난해 3천9백만t으로 줄였으며, 지난 l월부터 국제가격·경화결제를 요구함으로써 동유럽국가들에 큰 타격을 안겨줬다.
동유럽국가들에 소련시장은 아직도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있다. 헝가리는 전체수출의 4분의1, 폴란드 4분의1, 체코5분의2, 불가리아 3분의2를 소련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동유럽 각국에선 이미 소련시장 상실로 인한 공장폐쇄·대량실업 등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동유럽국가들은 이 같은 안보적·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자체결속을 다지는 한편 나토·EC가입, 또는 관계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하벨 대통령은 지난3월 동유럽 지도자로선 사상최초로 벨기에 브뤼셀 나토본부를 방문, 나토가입에 대한 체코의 관심을 표시한바 있다. 하벨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안보동맹인 나토는 같은 이상을 표방하고 있는 이웃들에 문을 닫아선 안된다』고 역설했다.
레흐 바웬사 폴란드대통령도 지난 3일 브뤼셀에서 『동유럽은 소련과 유럽간 완충지대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비록 가입은 아니더라도 동유럽에 대한 나토의 합당한 안보상 배려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토의 반응은 매우 냉담하다. 지난달 초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나토외무장관회의에선 소련 및 동유럽국가들의 민주화·시장경제이행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의, 나토의 역할확대를 선언했다.
그러나 나토는 동유럽국가들의 나토가입을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있다. 나토의 이 같은 입장은 소련을 의식한 때문이다. 동유럽국가들의 나토가입은 소련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뿐 아니라 고립감을 느낀 소련이 위험한 행동으로 나옴으로써 유럽전체의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2국간주의」 모색>
만프레트 뵈르너 나토사무총장은 지난 4월 프라하에서 열린 유럽안보국제회의에서 『소련의 역할 없이 유럽의 안보는 생각할 수 없다. 나토는 현재의 방어선을 동진 시킬 생각이 없다』고 동유럽국가들에 대해 나토가 문호를 개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EC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EC는 이미 12개국으로 포화상태며 동유럽국가들의 경제수준으로 볼 때 이들의 가입은 앞으로 빨라야 5∼10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방측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기능확대방안. 지난해 11월 파리에서 열린 CSCE 정상회의는 CSCE를 회의에서 기구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했다.
CSCE는 이를 위해 분쟁방지센터(빈), 사무국(프라하), 자유선거사무소(바르샤바) 등 3개 상설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CSCE가 과연 안전보장기구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동유럽국가들은 매우 회의적이다.
체코 외무부 공보실장 티보르프리솔 박사는 CSCE는 침략행위를 격퇴할 수 있는 힘도 권한도 없는 「이빨 없는 협의기구」라고 취약성을 지적한다. 프리솔 박사는 이와 함께 ▲CSCE는 유사시 안전을 지킬 수 없다 ▲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 후 동유럽엔 집단안보기구가 없다 ▲나토는 비가맹국을 방위할 의무가 없다는 「3개의 없다」로 오늘날 동유럽국가들이 처한 불안한 안보상황을 설명한다.
동유럽국가간 자구노력도 적극화화고 있다. 하벨 체코대통령은 지난해 4월 체코· 폴란드·헝가리 중유럽 3국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것은 그후 오스트리아·유고·이탈리아가 가세, 중유럽 6개국 기구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뒤 이를 대신할 안보장치로 「2국간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동구 아닌 유럽열망>
소련은 지난 4월 루마니아와 선린우호조약을 체결한 뒤 다른 동유럽국가들과도 이 같은 조약을 체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체코·헝가리·불가리아·폴란드 등은 선린우호조약 내용 중 『서로 「적대적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자신들의 EC·나토가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소련이 비록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해체했으나 앞으로도 동유럽을 소련에 비적대적인 완충지대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풀이한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중유럽」이란 말을 잊고 살아왔다. 제2차 대전 이후 유럽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사라졌던 중유럽이 이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유럽이란 독일을 포함, 구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오스트리아·폴란드·체코·헝가리 등 유럽의 중부지역을 일컫는다.
헝가리 과학아카데미산하 유럽연구소는 헝가리가 다시 유럽에 복귀하기 위한 지적 뒷받침을 위해 지난해 8월 설립된 연구기관. 유럽연구소 부소장 아틸라 포크교수는 『헝가리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일부였으며 또 일부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헝가리는 지난 45년간 인위적으로 유지돼왔던 동유럽이리는 틀에서 벗어나 다시 중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헝가리 대외무역장관이며 저명한 경제학자인 벨라 카다르씨는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지금 동유럽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유럽개념」의 회복이며 이를 위해 서유럽도 물질적·정신적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동유럽은 이류사회로 전락,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하고 있다. <글 정우양특파원 사진 신동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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