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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6. 제주도 하멜 상선전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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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국토박물관이라는 이름에 맞든 안 맞든 나는 이번 순례처로 제주도 용머리 해안의 '하멜 상선전시관'을 찾았다. 한민족은 유난히도 민족적 폐쇄성이 강해 우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외국인에 대해 별반 반응도, 기본 지식도 없는 행태를 보이며 살고 있다.

10년 전 나는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을 조사하러 갔다가 박물관 곁에 세브란스 뮤직홀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교차했다. 우리나라에 신식 의료기관을 세워준 그 고마운 분에게 너무도 무지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데 올해 하멜 표착(漂着) 3백50주년을 맞아 남제주군에서 그가 타고 온 배의 모형을 만들고 기념관을 꾸몄다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여기를 찾아간 것이다.

헨드리크 하멜(Hendrick Hammel.1630~92)은 1630년 호트쿰시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스페르웨르호를 탔다. 이 배는 함포 30문이 장치된 3층 갑판의 5백40t급 범선이다. 1648년 4월 네덜란드를 떠난 이 배는 8개월 뒤인 12월 자바섬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도착해 이후 4년간 페르시아 등지를 다니며 무역활동을 했다.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 선원 64명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표착한 곳은 그동안 남제주군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로 생각돼 하멜기념비가 진작 세워졌고 하멜상선전시관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근래에 발굴된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李益泰.1633~1704)의 '지영록(知瀛錄)'에는 "차귀진(遮歸鎭) 아래쪽 대야수(大也水) 연변"이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난해 8월 15일(하멜이 표착하기 하루 전날) 국립 제주박물관 학예원들이 '항해와 표류의 역사' 특별전을 준비하며 하멜의 표류 경로를 조사해보겠다고 배 한 척을 빌려 바다로 나갔다가 때마침 태풍 루사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 간신히 도착한 곳이 차귀도였다.

스페르웨르호에는 녹피.명반.설탕 등 많은 무역상품이 실려 있었다. 난파된 배에서 건진 이 물품들을 조선정부는 모두 돌려주었고 그들은 이것을 팔아 살림에 보태쓰기도 했다. 조정에선 26년 전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표착해 귀화한 박연(朴燕.벨테브레. 1595~?)을 통역으로 보내 자세한 경위를 조사했다.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고 무과에 급제해 훈련도감에 근무하며 병자호란에도 참전하고 전쟁 후 병기 개발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하멜 일행은 일단 제주도에 억류돼 있었는데 표착 10개월 만인 1654년 6월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됐다. 서울로 끌려와서는 효종의 신문을 받았다. 임금은 이들에게 호패를 내려주며 훈련도감의 박연 아래 배속시켰다. 표류된 외국인을 송환한 예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붙잡아두고 북벌정책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화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호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외교문제로 번질 공산이 커지자 조정에선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입막음하고 모두 강진으로 유배시켰다. 이리하여 1656년 3월 이들은 강진 병영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들은 각종 잡역에 동원됐고 한달에 두번은 점호를 받으며 주로 병영성과 장터의 풀을 뽑는 일을 했다. 하멜 일행은 병마절도사에 따라 가혹한 사역을 당하기도 했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하멜은 흉년과 질병이 유행할 때 동네사람.승려에게 도움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그렇게 7년을 보낸 1663년 이은 흉년으로 이들은 여수.순천.남원으로 분산 수용됐다. 여수에서 좌수사는 하루 1백70m의 새끼를 꼬게 하고 겨울비를 맞으며 점호 자세로 온종일 서있게 하는 등 고통을 주었다. 꿈도 없이 억류생활만 계속되는 하멜 일행은 다시 탈출을 결심했다.

우선 작은 배 한척을 두배 값으로 구입해 놓고 1666년 9월 4일 밤 8명이 탈출했다. 풍랑을 넘고 넘어 이들은 3일 뒤 일본 고도(五島)에 표착했다. 그리고 곧 나가사키의 본사로 인계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28일 만이었다.

하멜은 나가사키에 체류한 1년간 지난 13년 동안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가 이 보고서를 쓴 것은 서기로서의 임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3년간의 임금을 요구하는 서류의 첨부자료였다. 그래서 그는 아주 사실적으로 때로는 고생한 것을 강조하며 날짜별.연도별로 기술했다. 회사의 심의위원회는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회사는 배의 난파책임을 이들에게 물어 결국 보상비 명목으로 소액만 지급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험금을 타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인가보다. 다행인 것이 조선에 남아있던 7명도 외교협상을 통해 송환돼 1668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출범 후 20년 만의 귀향이었다.

하멜의 보고서는 곧바로 책으로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는 구텐베르크 활자혁명으로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요즘 새 영화가 나왔다는 것 이상으로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 출간 1년 뒤 프랑스어판이 나왔고 또 이듬해엔 독어판, 그리고 영어판이 속속 출간됐다. 이를 계기로 코리아는 유럽 모든 나라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멜 보고서'(중앙M&B)는 기행문학으로도 성공해 유럽의 유명한 기행문학 전집 속에 들어갔고 이 책은 결국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외국인이 쓴 가장 충실한 조선견문록이 됐다. 여기서 우리는 기행문의 생명은 문체가 아니라 그 내용의 절절함에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배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하멜을 계기로 일본의 아리타(有田)백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연결돼 유럽에 진출하는 길이 열렸 듯 조선이 국제교역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제주도 용마루해안에 세워진 '하멜 상선전시관'은 난파된 스페르웨르호를 80%로 복원한 것으로 배의 길이가 36m가 넘는 거대한 범선이다.

내부에는 하멜의 표류 과정부터 '하멜 보고서' 출간에 이르는 관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제2전시실로 들어가면 갑자기 히딩크와 월드컵으로 꾸며져 있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해는 가지만 하멜 답사의 여운을 '뽕짝'으로 풀어버린 것 같아 뒤끝이 영 개운치 않다.

하멜은 이후 동인도회사에 복직돼 회계사로 근무하며 한차례 동방을 다시 다녀갔고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는 독신이었다. 어떤 소설가는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못 잊어 결혼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억류기간에 혼기를 놓친 것이라고 하는데 '하멜 보고서'에는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hjyou@mju.ac.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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