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무거워진 럼즈펠드…표정 굳은 채 말 극도로 아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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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은 한국 방문 기간 내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6일 전용기를 이용해 서울공항(경기도 성남)에 도착했을 때 내외신 기자들이 몰렸지만 간단한 포즈조차 취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헬기를 이용해 용산기지에 내린 뒤 다시 차량편으로 숙소인 신라호텔로 향했다. 그의 행렬에는 미 국방부 소속의 전속 경호원과 주한 미대사관 관계자들이 인의 장벽을 쳐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럼즈펠드 장관의 침묵은 17일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조영길 국방부 장관과의 단독회담 공개 환담에서도 이어졌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이 풀단을 구성해 서울에서의 두 장관 첫 대면 표정을 취재했지만 럼즈펠드 장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曺장관이 나서 "럼즈펠드 장관은 취임 3년 만에 방한한다"며 "1977년 첫 방한 이후 26년 만에 왔으니 한국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분위기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연출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직후 曺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을 주한 미대사관 소속 통역에게 재차 확인하는 등 꼼꼼한 모습을 보였다. 또 파병 규모와 관련한 한.미 간의 입장 차이 등 민감한 질문에는 공동 성명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답하려고 조심하는 태도였다.

회견 내내 그의 표정은 대체로 어두웠다.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의 대테러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를 높이며 주먹을 불끈 쥐곤 하던 그는 이날 차분한 목소리로 원론적인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럼즈펠드 장관이 한국의 '3천명 재건지원 위주의 부대 파견'안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회견 후 曺장관의 집무실로 향하던 럼즈펠드 장관은 입구에 설치된 '국방의 비전' 전시물을 들여다 보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한국전 때 서울을 수복한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는 사진을 보고는 '베리 나이스'(Very nice)를 연발하기도 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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