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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후유증이 주는 교훈/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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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주일동안 통일독일의 여러지역을 방문,동서양측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절실하게 듣고 확인한 얘기는 통일후유증의 심각성에 관해서였다.
그들의 공통적 지적은 통일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다가왔고,그로 인해 적어도 차근차근 10년이상 준비했어도 모자랄 과제들이 한꺼번에 닥친데다 어디에서도 해법을 암시할만한 선례를 찾을 수 없어 정부·국민 할 것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목격하면서 먼저 분단과정,통일을 향한 양측의 오랜 교류,적대감의 정도,경제부담 능력,국제환경 등이 한반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독일의 예를 그대로 우리에게 대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으로서 지금 독일이 겪고 있는 몸살을 각별히 연구하고 대비하는 것은 독일이 그토록 목말라했던 통일의 과정과 그 후유증의 선례를 체득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값진 기회가 아닐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독일은 우리에게 통일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후유증을 최대한 줄이는 국민적 통합이 뒤따르지 않으면 통일이 결코 문제의 시작이지 완결이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사실 지금 동서독이 겪고 있는 후유증은 당장 남북한에 수평적용할때 우리로서는 감히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준비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다소 시일이 걸리겠지만 동서 어느쪽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란 낙담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맞을 통일 후유증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했다.
알다시피 서독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에다 무역흑자 2위국이며 동독은 동구 제1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독은 동독보다 무려 10배나 많은 GNP를 기록(실제는 그 이상),돈으로 동독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독일 정부는 당혹과 무력감에,서독인은 불만과 짜증에,동독사람들은 좌절과 박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앞으로 4,5년은 갈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전망이다.
갈등의 본질은 크게 보아 동독의 경제가 알고보니 나빠도 너무 나쁘다는 점과 45년이상 단절되어 살아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벽이 동족간 통일이란 환희만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을 정도로 두껍다는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서독 정부와 국민은 자본·기술·생산면에서 어느 것 하나 건질 것 없는 빈껍데기의 거대 부실기업을 인수해놓고 쩔쩔매는 형국이며 동독주민은 그들이 쌓아온 45년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가운데 불안한 새 출발을 강요받는 모멸을 겪고 있다.
동독의 실체가 얼마나 허무한가는 동독 경제가 통일후 불과 몇개월만에 파탄에 빠진 것만으로 쉽게 입증된다. 동구 제1위란 자부심은 막상 합하고 보니 생산성이 서독의 30%에도 못미치고 대외경쟁력이 거의 없다는데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공장시설이 고철취급을 당하고 있고 8천여개의 국영기업은 서독이 주도하는 신탁관리청(트로이한트)에 의해 서독과 서구기업에 매물로 나와 있다.
감량경영 또는 폐업으로 동독 전체 노농인구의 절반가량이 실업상태에 놓여있고 독일정부는 이들 실업자를 먹여살리는데만 금년말까지 1천3백억DM(한화 53조3천억원)을 쏟아 부어야할 형편이다.
이뿐 아니다. 시설이 낙후되고 공해에 무방비상태인 동독의 사회간접시설을 서독수준에 맞추려면 적어도 연간 1천억DM(41조원)씩 4∼5년은 투자해야 한다. 또 동독의 공장을 팔고 신규투자해 제대로 가동하려면 무려 8천억DM(3백28조원)이 소요된다는 것이 독일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동독 주민은 이같은 복구작업에 꿈이 부풀어 있기는 커녕 섣불리 가졌던 통일의 환상을 원망하며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자본주의에의 적응,즉 서독화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필자와 토론을 벌인 구동독 라이프치히시의 시의원들은 『우린 지금 서독시민의 절반밖에 안되는 실업수당으로 폐수처리당하듯 재활훈련을 받고 있다』며 『서독인은 우리를 하등국민 취급하며 물질·정신 모두를 강도처럼 뺏어가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이런 동독인을 보는 서독인들의 인식은 냉담하며 준비없이 부실기업을 인수해 증세의 고통을 안겨준 콜 총리 정부에 불만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
『이빨이 아파 치과에 찾아왔으면 드릴링하는 고통은 참아야 할 것 아니냐』(레만그투베 라히프치히 시장·서독 출신),『실직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자유경쟁을 배워야 한다』(노이에 차이트지 간부),『그들이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것 외에 우리가 부담을 덜어줄 방법은 없다』(BMW간부)등…. 통일비용을 각오는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동독이란 부실기업의 정상화자금 규모엔 혀를 내두르는 것이 보편적 서독인의 감정인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동독 재건작업은 진행되고 있다. 독일 외무부·내무부 관계자는 『자유민주주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통일은 소용없다는 서독국민의 확고한 컨센서스와 튼튼한 경제력이 4∼5년이면 동독주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선례를 참고한다면 이제 우리의 진정한 통일준비는 흡수통합이든 뭐든 동독보다 훨씬 열악한 북한이란 부실기업이 우리쪽으로 넘어 왔을때 어떻게 인수할 것인가를 대비하는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자면 과격운동권의 통일지상주의나 통일의 시기에 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정치적 오도보다는 내부적 안정과 경제발전에 국력이 한층 모아져야 할 것이다. 지금은 통일의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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