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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떼려는 진보 담론 열린 민족주의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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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제 20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넘어, 21세기 '국제협조.국제연대의 시대'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최근 '민족주의의 시대-일제하의 한국 민족주의'(경인문화사)란 책을 펴낸 한국사학자 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결론이다. 그는 "식민지-분단-건국-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민족주의"라고 규정했다.

'민족주의를 넘자'는 표현의 구체적 의미를 묻자 박 교수는 "민족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가 아니라 국제적인 협조 아래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라며 "남북한 통일을 생각하면 민족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제 민족주의로 접근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고 말했다. 역사학계의 한 연구자는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했던 한국 사학계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한편으론 과감한 '내부 고발'의 발언으로, 다른 한편으론 배타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많은 연구자의 고민을 대변한 것으로 들린다"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탄생한 진보 진영 단체명엔 '민족'이란 말이 상징처럼 들어간다. 88년 창립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의 김용태 회장은 "개인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지만, 회원들의 문제 제기가 있으면 '민족'이란 표현을 빼는 문제를 논의할 수 있으며, 대대수가 동의한다면 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민예총 차원에서 명칭 변경 논의는 아직 없었지만 큰 틀에서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20세기는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6월항쟁 주역들의 핵심 이념도 민족주의였다. 하지만 민주화 20주년을 맞는 2007년, 진보 진영의 핵심 이념인 민족주의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표적 진보성향 문학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에서 '민족문학'이란 표현이 빠진다는 보도(본지 1월 25일자 8면)는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월항쟁 이후 20년 만의 변화다.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앞서 민족이 우선함을 강조한다.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배우며 많은 이가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분단 이후 민족통일은 지상과제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위상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에서, 섣불리 예단할 순 없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 변경은 진보 패러다임의 변화까지 점쳐보게 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인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주역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명칭 변경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명칭에서 '민족문학'이란 표현을 빼는 것이 작가회의의 노선 변화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백 교수의 지적처럼 명칭 변경은 형식상의 변화일 수 있다. 하지만 형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시대정신의 변화를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06년 9월 중앙일보 창간 특별 인터뷰에서 소설가 황석영씨는 "개인적으론 이미 민족주의와도 결별했다"며 "세계가 거의 몇 초 만에 인터넷으로 소통되는 현실에서 아무리 내 감정이 소중해도 남과 말이 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한복판에서 생활해 온 3년간의 경험이 녹아 있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는 이제 용도폐기해도 좋은 것인가. 서양사학자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이미 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며 탈민족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2006년 서울대 이영훈.박지향 교수 등이 편집해 펴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은 탈민족주의로의 시대변화를 집약한 작업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는 필요하다는 주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민족통일의 시대적 과제를 우선시하는 시각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로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많이 유입되고 또 국제결혼도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가 대립하는 형국이다.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민족'이 들어간 진보 진영 단체의 명칭 변경에 대해 "민족이란 간판의 인기가 떨어지니까 재포장하는 차원에서의 명칭 변경이라면 의미가 없다"며 "20세기의 민족 개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백지상태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주의 없는 애국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혈연을 강조하는 20세기적 '민족'개념은, 이제 후천적이고 인위적인 21세기 민족 개념으로 변경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서양사학자 김기봉 경기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라고 해서 민족 개념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혈연 중심의 단일 민족주의를 폐기하고 열린 민족주의로 민족 개념을 다시 정의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열린 민족주의를 나는 탈민족주의로 보는데, 탈민족주의는 반(反)민족주의와 다르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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