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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5)|<제85하>나의 친구 김영주(끝)-이야기를 마치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영주·박창수·문기찬을 북으로 떠나 보내고 필자는 학교에 가서 복교수속을 마쳤다.
해방 후 보성전문은 고려대학으로 바뀌어있었다.
동급생이던 이철승은 우익학생의 리더로, 정모·박모 등은 열렬한 좌익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 진영에 나를 끌어들이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신중했다. 집을 떠난 3년 동안의 격동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특히 상해에서 이충모 선생이 들러준 이야기나 김영주가 말했던 「약소민족 살길은 오직 소연방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라는 권유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 집에는 예기치 못한 너무나 큰 일이 벌어졌다.
필자보다 두살 위인 작은 형(이용준)이 결혼한지 3개월만에 먼저 타계한 형수님을 따라 1주일만에 자살한 것이다. 당시 (1947년) 떠들썩했던 「흑석동 부부자살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엄청난 슬픔은 천주교 집안에서 곱게만 자랐던 나를 (그때까지 나는 술·담배를 몰랐다)타락하게 만들었다. 형이라기 보다는 두살 차이의 다정한 벗이 있던 죽은 형의 생각으로 나는 실의에 빠져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음을 계속했다. 술값을 대기 위해 집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내다 팔 정도로 비뚤어져 가고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친구들이 앞장서서 나를 군대에 집어넣었다. 혼자는 죽어도 못 가겠다고 하자가장 친했던 장부억(6·25때 납북)이 들러리를 서 주었다.
이철승(전 신민당당수)이 당시(1949년) 참모총장 채병덕의 추천장을 받아 와서 장부억과 나는 정훈 1기생으로 입대했다. 고대 축구선수였던 장부억의 집은 (익선동56번지. 지금은「대하」라는 큰 요릿집이다.
육군대위 이용상(필자)은 강원도 용포리에 있는 9사단 정훈 부장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참모장 박정희 대령을 만났다. 소개한 사람은 당시 군수참모 김재춘 (예비역 준장· 전 국회의원) 중령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단 간부들이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사단장과 몹시 틀어진 참모장 박정희 대령은 아예 꾀병으로 출근도 않고 숙소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9사단에 부임한 후 첫 참모회의에서 사소한 일로 사단장과 입다툼을 했던 그날 밤, 나는 참모장 숙소로 불려갔다. 사단장에게 대들다니 웬 녀석인가하고 호기심에서 불렀을 것이다.
가보니 거기 모여있는 장교들은 모두 사단장 반대파라는 것이다. 첫 눈에 박정희 대령과 나는 배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후부터 우리는 가끔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러던 얼마 후 박 대령은 대구에 있는 정보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가 떠나기 전날 밤 박정희 파들은 모두 그의 숙소에 모여 송별회를 열었다. 유독성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면서 중공군이 30㎞지점까지 육박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끝까지 남아있던 호걸 김재춘 중령도 보이지 않고 자리에 남은 것은 박정희 대령과 나 뿐이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두 사람만의 기회를 기다렸었다.
『참모장님! 정보학교에 가신다니 간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김영주와 처음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평양에 간 후 김영주가 어떻게 됐는지 알러달라』고 했다.
내 얘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박 대령이 『이 대위, 그 친구가 일본통역을 했기로서니 험될게 뭐요. 그런 동생을 김일성이 때려죽인다니 말이나 돼요. 나는 김영주가 결코 조국을 배반했다고는 보지 않소. 그 친구가 일본통역을 한 저간에는 이 대위가 말한 것처럼 딱한 사정이 있지 않았소? 내가 만군에간 것도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이오…. 아무튼 잘 알았으니 그 친구 소식 있는 대로 알리지요. 걱정 마시오』(그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홀연히 만주로 가야만 했던 딱한 사정을 필자는 평생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박정희 대령도 얼큰하게 보였지만 조금은 긴장하고 있는듯 했다. 당시는 이북에 친지만 있어도 그림자가 뒤를 밟을 때였다. 하물며 김일성의 친동생 소식을 부탁한 나도 나지만 이를 흔쾌히 수락한 박 대령도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남북회담 때 김영주는 북측 대표였다.
나는 면회를 요청, 박 대통령과 두시간여에 걸쳐 내 의견을 털어놓았다.
박 대통령은 앉아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권했으나 나는 『내 의견이 수용될 때까지는 앉지 않겠다』며 선 채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의전비서관 조상호씨가 두번이나 문을 열고 들어왔으나 대통령과 필자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두번 다 말없이 나가는 것이었다. 미리 약속된 중요한 스케줄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후에 들었다.
그날의 단독대화가 앞으로 밝혀질지는 모르나 박 대통령이 끝으로 나에게 한 말은 『이 동지는 공산당에 너무 아마이야』라는 일본말이었다. 「아마이」란 「달콤하다」는 일본말이다. 그때의 경우는 내가 공산당에 점수를 너무 후하게 준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처참했던 중일 전쟁 중에도 중국호남성의 평화스러운 산과 들과 강이 어제처럼 내 눈에 선하다.
저 푸른 언덕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구나. 그 사람은 「나의 친구 김영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잡념 없던 그 시절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생전에 그 즐거움이 있기를 간절히 희구하면서 나의 사상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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