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식계의 새 물결] 10. 기호학, 대중문화를 만나다 (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기호학이라 하면 내공이 깊은 인문학자들조차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기호학은 그리 어려운 학문도, 저 멀리 떨어진 고고한 성에서 특별한 사람들이 논의하는 지식도 아니다. 실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매일 매일 기호적 실천을 한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언뜻 스쳐 지나간 간판의 뜻을 새기고 퇴근해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 속뜻을 헤아리고 자신의 심정을 타인에게 알리려 가장 적절한 낱말과 말투를 선택하는 자체가 모두 기호적 실천이다.

축구 용어를 알지 못하면 축구를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은 기호 없이 사고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 자체가 의미다. 의미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과 연관을 갖는다.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똑같이 빈민굴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한 사람은 히틀러가 되고 한 사람은 채플린이 되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다른 요인도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자신이 맞은 '가난'이란 텍스트를 읽은 차이다.

가난을 '가진 자에 대한 박탈감'이나 '악착같이 돈을 벌어 복수할 원천'으로 읽은 아이는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반면에 가난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심연의 고통이나 의미에 다다르는 길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로 읽은 아이는 채플린과 같은 사람이 된다.

읽기의 차이는 한 사람의 운명만을 좌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신라 진평왕 때 혜성이 출현해 신라 왕을 상징하는 심대성을 스치고 지나가자 신라인들은 이를 흉조로 읽어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인다. 때마침 왜병마저 침입한다. 이때 융천사가 나타나 혜성이 빗자루 모양으로 생긴 것에 착안해 그것은 '화랑이 가는 길을 쓸어주는 길한 별'이라 읽는다. 그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혜성가'를 부른다. 이에 사기를 얻은 화랑은 왜병에 맞선다. 결국 왜병은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간다. 이처럼 아는 만큼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만큼 보고, 읽는 만큼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의미의 해석이 개인, 더 나아가 집단의 운명을 좌우한다면 기호학은 고고한 성에서 나와 대중과 만날 필요가 생긴다. 대중의 삶과 문화를 다룰 때 중요한 것은 대중의 눈높이, 대중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과 맥락에 따라 거짓말 또는 신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기호학과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중의 기호학'이 다른 점은 텍스트의 맥락 속에서 대중의 따스한 피가 흐르고 살 냄새가 나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무지하고 대중 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면서, 동시에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통속성이 곧 저질도 아니다. 주름진 얼굴을 가리려 화장을 짙게 하고 막걸리 한 잔에 아무렇게나 토해내는 시골 주막 늙은 작부의 '동백아가씨'에서 어떤 명작 못지않은 사랑의 진실과 삶의 애환을 읽어낼 수 있다.

관건은 대중이 올바로 의미를 창조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의미가 1대1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호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여자를 두고 '달 같은 여인'이라고 말하면 '달처럼 눈부신 여인' '달처럼 얼굴이 둥근 여인' '달처럼 온화한 여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달처럼 얼굴이 곰보인 여인' '달처럼 얼굴이 떡판인 여인'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후자의 뜻으로 '달 같은 여인'이라 했는데 해죽거리는 여인이 있다면 바보 소리를 듣는 것처럼 대중은 곧잘 지배층이 만든 신화와 이데올로기에 속는다.

그러기에 대중의 기호학은 텍스트에 감추어진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대안의 비전을 제시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거짓말하기의 학문"이라 정의한다. 카드 광고를 보고 광고 기획사의 말대로 연봉 1억원이 넘는 보보스족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카드를 긁어댄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상당수 대중은 이 광고를 보면서 자신이 광고 속의 정우성인 양 착각해 카드 사용을 남발하며 과잉소비를 행하다 파산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중산층에 동일화했기에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하며 사회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개인 차원이든, 현실의 차원이든 인간의 삶이란 의미의 투쟁이 쉴새없이 일어나는 장이다. 지난 한.일 월드컵 또한 대중과 지배세력 사이에 의미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중은 월드컵을 공동체주의와 접합해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마당으로 삼았다.

10대와 20대의 수험생.여성.제3세계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가가 점유했던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을 점거하고 함께 환호했다. 반면에 국가와 언론은 이를 국가주의와 접합해 애국심을 증대하고 사회적 통합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기존의 기호학이 맥락을 경시했다면 대중의 기호학자들은 맥락을 중시한다.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짐을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기존의 기호학과 달리, 대중문화 텍스트 분석에만 머물지 않고 대중이 살아가고 노동하는 맥락 속에서 한 잔 술에 조용필을 노래하고 한 잔 술에 김지미를 추억하면서 별 것도 아닌 가락에 감동하는 대중의 가슴 속에서 파도처럼 쉼 없이 요동치는 그 무엇을 잡아내, 대중성의 입장에서 정리한다. 대중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카오스.사이버.디지털 등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도 제대로 분석해 대중이 올바른 의미를 찾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기호학자들의 의무이리라.

이도흠 한양대 교수.국문학

◇ 약력=▶한양대 국문과 박사, 한양대 교수, '문학과 경계'주간, 의상.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원효의 화쟁 사상과 기호학을 결합한 '화쟁기호학'을 제시해 학계의 주목을 받음. ▶저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화쟁사상을 통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종합',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공저)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