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모든 것은 변하는 것 아닌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그 전날 밤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김 부상의 얼굴은 불콰했다. 러시아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차관과 보드카를 마신 것인지,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기분 좋다고 한잔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김 부상은 확실히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도 전과는 다르다. 장밋빛 일색이다. 지난주 베를린에서 있었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의 회담 결과에 대해 그는 "만족한다" "좋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김 부상과 만나고 난 천영우 한국 측 수석대표는 "(국민에게) 설 선물을 하나 가져다 드리겠다"고 말했다. 설날인 다음달 18일 이전에 재개될 6자회담에서 뭔가 가시적 성과가 있을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태가 돌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 아니냐"는 김 부상의 발언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북한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한 말이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된 북한 계좌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북핵 문제의 실질적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북한의 기존 입장이었다.

베를린 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과 양자회담은 가능하지만 별도의 북.미 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김 부상과 힐 차관보는 16일부터 사흘간 베를린의 양국 대사관을 오가며 접촉을 계속했다. 6자회담의 연장이라고 미국은 해명했지만 사실상의 북.미 직접 대화였다. 미국이 변한 것이다. 덩달아 북한도 변함으로써 긍정적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핵 문제의 해결 지침은 '9.19 공동성명'에 이미 나와 있다. 첫 단추를 어디서부터 끼우느냐가 문제다. 미국은 북한의 핵 활동 동결과 이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구성된 초기단계 이행 조치 패키지를 북한에 제시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영변의 5㎿e급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현장 감시를 허용하면 미국은 에너지와 경제 지원을 재개하고 대북 안전보장과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전환 문제에 대한 협의에 착수하는 것으로 양해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북핵 문제를 ▶미래 핵 동결 ▶과거 핵 규명 및 폐기라는 두 단계로 나누고, 손쉬운 첫 단계부터 이행한다는 것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말한 2막 1장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면 이를 바탕으로 과거 핵 문제 해결, 즉 3막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라는 북핵 문제 해결의 최종 목표까지 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窮卽變 變卽通 通卽久)'고 했다. '주역(周易)'에 있는 말이다. 이라크전의 실패로 부시 행정부는 궁지에 몰려 있다. 핵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김정일 정권은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 19세기 중반 영국 총리를 지낸 헨리 템플 파머스턴이 한 말이다. 국제사회의 변하지 않는 철칙이다. 북한과 미국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라고 동북아의 베트남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한반도의 봄'이 손짓하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