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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좀 올라서 죄송 … 하지만 잡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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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밤 청와대에서 신년특별연설을 통해 참여정부 재임 4년의 각종 정책을 평가하고 남은 임기의 국정 운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특별연설은 파격이었다. 청와대 측은 노 대통령이 프롬프터(원고 자막기) 없이 연설할 것이라고 사전 예고했다. 윤승용 홍보수석은 "즉석 연설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파격 실험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한 시간 동안의 연설에서 당초 배포한 연설 원고의 절반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연설문 준비과정에서 청와대 일부 참모들이 시간 부족을 들어 내용을 줄일 것을 건의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과욕이 빚은 참사인 셈이다.

연설문 원고량은 A4 용지 61쪽에 4만3000자가 넘었다.

시간에 쫓긴 노 대통령은 "시간이 안 되겠는데요" "대강 넘어가겠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건너뛰었다. 이 바람에 남북 정상회담 관련 발언 등 외교안보 분야는 준비한 내용을 하나도 언급하지 못했다. 당초 원고에 있던 야당과 일부 언론에 대한 비판도 생략된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TV를 통해 노 대통령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수차례 방영되기도 했다.

급기야 노 대통령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보면 부럽다. 나도 한 10시간 주면 일주일에 한 시간씩 10주 동안 하고 싶은 말을 다할 텐데"라며 "나머지 부분은 원고를 인터넷(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겠다"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시간 배분에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사전에 청와대 참모들로부터 '막말 경계'를 건의받은 때문인지 "새발의 피" "(경제가) 골병이 들었다" 등 원고에 없는 즉석 표현을 쓰면서 방청객들에게 "이 말은 괜찮죠"라고 해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이 같은 조심에도 불구하고 "2004년 경제가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언론에 떡이 됐다"는 발언이 여과 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연설회장인 청와대 영빈관에는 한명숙 총리 등 국무위원들과 정부 부처 공무원들, 국정브리핑의 단골 네포터(네티즌 리포터) 등 일반 시민들을 합쳐 250여 명의 방청객이 참석했다. 다음은 연설 요지. 괄호 안은 원고에는 있으나 실제 연설에선 제외된 내용.

◆경기와 경제정책

참여정부 평균 경제성장률이 4.2%다. 종합하면 OECD 회원국 중 7대 강국이다. 이걸 가지고 '경제 파탄'이라고 하면 한국 경제는 영원히 파탄이다. 4.2% 이상 성장 못하면 파탄이지 않나.

정치인이든 언론이든 위기나 파탄 같은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우리 경제를 더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4년에 그래서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떡이 된다'는 표현이 있지 않나. 야당과 언론에 혼났다. 언론뿐 아니라 국민도 "내가 이렇게 힘든데 위기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혼났다.

한마디로 하면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은 잘 가고 있다. 몇 자 적어오긴 했는데 도저히 설명할 시간이 없다.

◆사회·복지정책

사회정책.복지정책을 가지고 "좌파정책이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성장과 분배를 둘로 나누는 사고는 낡은 생각이다.)

경제 규모 커진다고 일자리가 느는 것 아니다. 일자리는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지난 2년간 열심히 일자리를 발굴해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실업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

시장을 넓히기 위해 싱가포르랑 FTA를 체결했고 캐나다랑도 협상 중이다. 미국과는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3월부터 EU와도 시작할 것이다. 농업이 한 가지 걱정이다. 다른 건 걱정도 안 된다. 하도 농민들이 아우성치고 우리 국민이 농민들을 걱정하니까.

◆부동산 가격 폭등

죄송하다. 좀 올라서 죄송하고, 국민 여러분 혼란스럽게 해 죄송하고 한번에 못 잡아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엔 잡힌다. 그간 못했던 강력한 정책 이번엔 다 썼다. 이젠 빠져나갈 데가 없다.

부동산 가격 왜 한번에 못 잡았겠나. 반대하는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이 계속 흔드니까 그랬다. 또 국민들이 정부를 안 믿고 집을 사니까. 부동산 신문들이 흔드니까 집값이 오르고 그러니 더 강력한 정책이 나오고 그랬다. 어쨌든 부동산 신문들이 자승자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안보 현안

(남의 나라 군대를 최전방에 배치해 놓고 '인계철선' 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주국가의 자세도 아니고 우방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현실의 의존보다 심리적 의존이 더 큰 문제다. 주도적인 작전통제권은 자주국가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자주국가로서의 체면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과 미래의 대북관계, 동북아 외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평시작전 통제권을 돌려받았다고 하나 실제 내용을 보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개헌 제안

우리 헌법에는 고칠 조항이 많다.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대충 손질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헌을 못하면 20년간 기회가 없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야당에게 불리한지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 이때까지 하자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공당이 이러면 안 된다. 이번에 개헌 못하면 나중에 사람들이 "노무현이 했어야 했는데……"할 것 아닌가.

◆언론·잔여임기

권언유착은 국민의 정부에서 끊어진 것 같은데 참여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언론과 대립하고 있다. 국민 피곤하다고 그만두라고 한다. 나도 힘들고 공무원들도 고생이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무너진 이후에는 언론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해 시민과 정부 위에 군림하고 있다. 정통성 있는 정부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당선됐을 때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축복해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맞아 아무도 나에게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위로한다. 어쨌든 내 관심은 역사의 평가도 아니다. 남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 시대가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과제를 뒤로 넘기지 않겠다.

남궁욱.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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