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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가 김동섭씨|30년간 121국 돌며 100만점 수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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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에머랄드·루비·사파이어·다이아몬드 등 보석류 6백20여종 25만7천여점, 2천여년 전 중국의 희귀 화폐 비전 등 옛날 돈 5만여점, 세계에서 가장 큰 알바니아의 1백돈쭝짜리 금화를 비롯해 전세계 1백57개국 통용화폐 2만여점, 지금은 자취조차 감춘 나라의 희귀 우표를 포함해 우표16만종 21만여점, 각종 보석원광 1천4백여점, 일반 각종 무늬광석 3천2백종 7천여점, 조개어패류 10만2천여점….
18가지 종목에서 무려 1백만점을 훨씬 웃돌 것으로 보이는 이 수장품들은 세계 유명박물관이나 자연사박물관의 소장품목록이 아니다.
보통사람이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이 수장품들은 지금은 다방을 경영하고 있지만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던 정치학 박사인 김동섭씨(55·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세계적이고도 동서고금에 유례가 드문 컬렉션이다. 이중 보석·화폐·광석·어패류·우표수집과 18종목 컬렉션부문 등 6개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그는 이밖에도 와이키키·나폴리·시드니 등 세계 5백25개 해수욕장 모래 3백g씩과 1천7년을 살았던 거북이박제를 포함한 박제품 4백20여점, 세계 각국 민속공예목걸이 7천여종 2만여점, 일곱 트럭분의 수석, 산호 1천3백여점, 담뱃갑 7만여점, 미니카·볼펜 등 그의 집과 6개소의 창고에는 진기품들이 분류되지도 않은 채 가득 차 있다.
『수집취미는 한의사였던 아버님 때부터 시작됐어요. 아버님은 각종 담뱃갑을 모으셨답니다. 어릴 때부터 수집품들을 보고자란 저는 어느 땐가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요.』
사회진출 후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자주 해외에 드나들게된 그는 선진국들의 선례를 보고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됐다고 했다.
독일·스위스·프랑스 등 구미선진국에서는 자녀들에게 물질적 유산보다는 박물관을 세워 사회에 환원, 정신적 유산을 물러주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고 이런 박물관이 한나라에 수천개 이상되는 국가가 흔하더라는 것.
『지금부터 22년 전인 69년의 일입니다. 스위스중앙은행에서 열린 세계화폐전시회에 엄청난 관객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귀국 즉시 아버님의 유품을 찾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지난날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시의원을 지냈던 김씨는 그 후 정치를 그만 두고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을 찾아다니며 원광을 취하거나 해수욕장 모래를 담아 우송하기 시작했다.
해수욕장의 경우 5백25군데를 모조리 뒤졌고 지금까지 여행한 국가만도 1백21개국에 이른다. 어떤 곳에서는 해수욕장 모래 3백g을 얻기 위해 며칠을 묵기도 했고 애써 구한 희귀품을 수송도중 분실, 며칠동안 밥맛까지 잃고 애통해 하기도 했다는 것.
그는 무수한 여행을 통해 배우고 얻은 것도 많다. 영어·일어·불어·독어·스페인어 등을 포함해12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고 그 밖의 15개국어로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케 됐다.
그의 수집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백여개 국에서 6천7백여종 10만2천여점을 수집한 조개껍질,2·5t트럭으로 8대분에 해당된다. 이들 조개 중 3천5백65점을 수록한 『원색 세계의 패류도감』(새시대평론사간)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작년에 용인자연농원에서, 올해는 경주와 포항에서 각각 조개·산호 특별전시전을 개최한바 있다.
『가족은 물론 3명의 아르바이트학생을 동원해 모두 6명이 4년여동안에 걸쳐 분류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겨우 57만여점을 정리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수장품들의 숫자를 모두 파악하지 못했어요. 단지 1백만점이 넘을 거라고 추측할 정도입니다. 수석의 경우엔 일곱 트럭분이란 것을 알 뿐 아직 손도 못댔습니다.』
수장품 중 값만으로 따진다면 물론 가장 비싼 품목은 보석류. 기록상 지구상에 분포한다는 6백72종의 보석류 중 90%가 넘는 6백20여종에 또 만7천여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에메랄드 원석의 경우 2백50캐럿이나 되는 큰 것부터 브라질산 천연캐츠아이(고양이 눈 형태의 보석) 까지 산지별로 구색을 갖추고있다.
그는 수집벽만큼이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동양한의대(경희대 한의대 전신)를 졸업한 그는 정치일선을 떠난 뒤 한때 경성화학식품공업(주)을 설립해 69년도에는 수출 50만 달러를 기록, 국내기업수출순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통조림회사와 사이다제조회사를 운영, 왕성한 사업의욕을 펼치기도 했다.
전국조기축구회를 주도해 왔던 그는 학업에 있어서도 79년 미국 골든 스테이트 대학에 등록, 「체육으로 국가발전」이란 당시로는 특이한 논문으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동국대 등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가 30년동안 여행한 국가숫자도 국내에서는 기록적이다. 태평양의 섬나라 통가에서 아프리카의 오지 기니 등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1백21개국에 이른다. 해외여행을 하는데 들어간 여비만도 90년말까지 6억원을 웃돌 정도.
그가 요즘 들어 박차를 가하고있는 계획은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함 약6천평 규모의 박물관을 스스로 세워 사회에 환원하는 일.
『오는 95년까지는 꼭 해내고 말겠습니다. 수년 전부터 이런 뜻을 밝혔더니 몇 개의 대학박물관과 공원에서 기증 요청이 답지하더군요. 저는 수장품을 공익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문화재관리국이나 서울 또는 제주도에 기증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증여세 부담 등 공공기관에 대한 기증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결국 내 힘으로 박물관을 짓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고 수장품을 수용할 면적규모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돼 현재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정부에서 박물관 부지만 제공해주면 좋겠어요. 부지만 마련된다면 경기도 삼송리 일대에 소유하고 있는 1만평 정도의 토지를 처분, 건축비를 마련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는 우리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악습의 하나가 재산상속이라면서 물질재산보다는 정신재산 상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도적으로도 증여세 등에 예외조항을 마련,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합니다.』
1남1여의 아버지이기도한 그는 자식에게는 「뚜렷한 족적, 영예로운 이름」만 남겨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 배유현 기자 사진 오종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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