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재계 ‘고교 파워인맥’ ⑤] 큰 밭 일구는‘선비 CEO’의 본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다른 명문고에 비해 대전고는 “학교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거물급 인사가 드물다. 그렇다고 큰 인물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대전고 출신들은 ‘양반의 고장’이라는 충청도 출신이어서 그런지 요란스럽지 않다.

▶대전고 교사 전경. (위 사진)
‘양반의 후손’인 대전고 학생들은 졸업을 앞둔 시점이 되면 머리에 갓을 쓰는 재가례(再加禮) 의식을 갖는다. (아래 사진)


대전고 동문들은 2005년 연말을 아프게 기억한다. 당시 대전고 동문들은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줄기세포 사건의 주인공 황우석 박사를 둘러싸고 옹호론과 비판론으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대체로 비평준화와 평준화 세대의 시각차여서 더욱 외부의 시선을 끌었다.

당시 송년회를 겸해 열린 재경 대전고동창회에서는 1960~70년대 졸업 동문과 1980년대 중반 이후 졸업 동문의 의견이 미묘하게 엇갈렸다. 동문회에 참석했던 대전고의 한 동문은 당시 상황에 대해 “황 교수에 대해 의견 충돌이 생겨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갔지만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며 “황 교수와 졸업 동기인 51회 졸업생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의견이 나왔다”고 말했다.

대전고 동문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된 황우석 전 서울대 석좌교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전고 동문들에게 그의 소식을 묻자 몇몇 동문이 조심스럽게 그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최근 서울 구로구 구로디지털단지에 연구실을 열고 연구활동을 재개했다. 황 전 교수는 다른 사람의 명의로 재단법인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을 설립하고 법인설립신고서를 제출해 지난해 11월 중순께 과학기술부로부터 최종 허가를 받았다.

재단의 총 재산은 25억 원 규모로 법인 대표이사로는 황 전 교수와 동향인 충남 부여 출신의 박병수 씨가 기재됐다. 신고서에 적힌 설립 목적은 바이오 신소재 탐색 및 개발사업, 동물 줄기세포 연구사업 및 동물 복제 연구사업, 바이오 장기 생산 연구 등 여덟 가지 연구사업이다.

그런데 대전고 동문들에 따르면 그의 이러한 재기 움직임에는 황 전 교수의 대전고 선배로 의류 수출업체를 운영하는 임모 회장의 뒷받침이 숨어 있다. 실제로 황 전 교수의 연구소가 입주한 곳은 이 회사가 사옥으로 사용 중인 건물로, 황 전 교수는 대략 150평가량을 연구실로 쓰고 있다.

건물주인 임 회장은 역시 황 전 교수와 동향인 충남 부여 출신에 대전고 선배며, 서울대 선배이기도 하다. 황 전 교수 연구소와 비슷한 규모와 수준의 인근 사무실 임차료는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500만 원 수준이다.

소리없이 황우석 박사 재기 돕는다

대전고 동문들에 따르면 임차료는 그의 개인적 후원자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대 수의대에서 함께 일했던 젊은 연구원 20여 명이 최근 이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동문들은 “황 전 교수가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 재개를 희망하나 연구자격을 상실해 불가능하므로 동물 복제와 무균돼지를 이용한 이종 장기 연구에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대전고 동문들은 “연구실이 일반에 노출되면 연구 활동에 방해를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면 2006년 말에는 한 노(老)동문의 소식이 대전고 출신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한일은행과 보람은행 행장을 지낸 이병선 씨와 약사 출신 최길순 씨 부부가 그 주인공.

이들은 사재 10억 원을 들여 고향인 충북 영동군 매곡면 장척리에 재단법인 장척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이 전 행장 부부는 출연금 10억 원의 이자 4,000여 만 원으로 매년 고향의 어려운 이웃과 학생, 효행자 등을 도울 계획이다.

이 전 행장 부부는 해마다 1억 원씩 더 보태 문화재단을 꾸준히 키워나갈 예정이다. 이 전 행장은 충북 영동 소재 매곡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닌 뒤 고향을 떠나 대전고, 서울대 상대 등을 나와 1957년 옛 흥업은행 사원으로 입사한 뒤 한일은행 명동지점장, 감사, 이사 등을 거쳐 1990년 한일은행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로 동문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 전 행장은 한일리스 회장, 한양투자금융 사장을 거쳐 1991~93년 보람은행장을 지내는 등 평생을 금융인으로 살았다. 이 전 행장은 1990년에도 숨진 아버지와 함께 고향 마을을 위해 써 달라며 5,000만 원을 보낸 후 해마다 마을회와 부녀회에 200만 원씩 전달해 왔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서 약국을 하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해 온 부인 최씨도 그동안 모은 돈 5억 원을 문화재단 설립에 보태 40여 년 이어온 부부 금실을 자랑했다.

대전고 출신 중에는 가업을 일으킨 대기업 오너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오너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기업을 이끄는 출중한 CEO를 많이 배출했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로는 송 자 대교 회장을 꼽을 수 있다. 송 회장은 대전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다.

원래 의사가 꿈이었던 그는 학창시절 자신이 색약이라는 것을 알고 인생 항로를 수정했다. 연세대 상경대를 마친 뒤 젊은 선배 교수의 권고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때 교육자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한다.

송 회장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미국 유학 시절을 가장 힘들었던 때로 꼽는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처음 들어 보는 경영학 공부를 하느라 겪은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태평양을 건너가게 하셨을 때는 결코 낙제하라고 보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귀국 후 연세대 교수로 부임했다. 연세대는 그를 평범한 교수로만 놓아두지 않고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게 했다. 산업경영연구소장을 시작으로 재무처장·상경대학장·기획실장, 나중에는 교수평의회 의장까지 거치고 1992년 결국 연세대 총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 뒤 명지대에서 다시 한번 총장을 지낸 그는 2000년 교육부 장관 자리에 올라 이목을 끌었다. 이듬해에는 교육 전문기업 대교의 회장으로 전격 영입되며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현재 그는 대교가 추진하는 국제화와 사업 다각화를 이끌고 있다. 그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교육사업 역시 국내시장에 머물러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꿈은 세계로 진출해 세계 1위의 교육기업인 일본 구몬을 제치는 것이다.

“출생아가 줄기 때문에 국내 어린이 시장에 큰 기대를 걸 수는 없어요. 교육 서비스 상품을 늘리고, 대상자를 성년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부족입니다. 결국 전 세계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업을 확대하지 않으면 힘들지요. 이미 국외 8개 법인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독일 베텔스만과 합작으로 중국 공략도 서두르고 있지요. 미국 시장에서는 구몬과 경쟁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송 자·이내흔 회장 등 간판 CEO 수두룩

그는 방문교육이 주류인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서는 공부방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찾아오도록 할 계획이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사교육비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 정부 지원을 받는 이들을 공략할 경우 손쉽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다.

▶(왼쪽부터)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정중 현대산업개발 사장,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박해춘 LG카드 사장

송 회장은 대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면 인수합병(M&A)도 마다하지 않을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 대상은 거론되지 않지만 “교육 서비스를 다양하게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송 회장과 더불어 대전고를 대표하는 CEO로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최측근 출신으로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이내흔 현대통신 회장을 들 수 있다.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씨름하며 보낸 그는 최첨단 정보기술(IT)회사를 맡아 몇 년 만에 시장 1위로 끌어올리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 회장은 현대통신의 비약적 성장 비결을 ‘3선(先)’이라고 말한다. “먼저 생각하고, 먼저 출발하고, 먼저 정복하라”는 뜻이다.

현대통신은 홈오토메이션, 쉽게 말해 ‘편리한 집’을 만드는 회사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휴대전화로 미리 에어컨을 켜고, 보일러를 작동시키는가 하면, 명절이나 휴가 때 빈 집에 도둑이 들면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경비업체로 자동 연결해 주는 등의 기능이 현대통신의 제품들이다.

2005년 매출액은 664억 원. 평균 시장점유율 40%로 업계 1위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주주들에게 은행 이자의 5배인 18%를 배당했다. 2005년 초에는 일본 현지 법인을 설립해 일본 최대 경비회사와 손잡고 곧 첫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이 회사의 최대주주(지분율 41%)이자 대표이사다. 1998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만 해도 120억 원에 불과했던 연간 매출액을 불과 7년 사이에 5배 이상 올려놓았다.

이 회장이 이 회사를 인수한 것은 1999년 5월. 물론 인수 결심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어느 날 “오래 했어. 이제 그만 해”라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한마디에 평생을 함께해 온 현대건설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다.

그때 고 정몽헌 회장 측에서 김영환 당시 현대전자 사장을 통해 인수 의향을 타진해 왔다. 나름대로 시장 조사를 해 보니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노느니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퇴직금과 아내의 저금을 털어 15억 원 가까운 인수자금을 마련했다.

“취임 후 2∼3년은 온갖 국내외 콘퍼런스를 쫓아다녔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업종이 건설과 매우 흡사하더군요. 자동차는 A에게 못 팔아도 B에게 팔면 되지만, 건설은 A를 수주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죠. 이 업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리가 같으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부단히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에 힘썼더니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왕 회장과 건설현장을 누빌 때에 비하면 지금의 업무 부하량은 일 축에도 못 낀다는 그는 지금도 왕 회장과 ‘무섭게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느슨해졌던 끈이 바짝 조여진다고 회고했다.

▶(왼쪽부터) 송 자 대교 회장,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 이내흔 현대통신 회장, 이석재 삼성코닝정밀유리 사장

이 회장은 대전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대통령비서실에서 뒤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 현대와 첫 인연을 맺어 ‘건설업계의 대부’로 불리기까지 오랫동안 현대건설 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대한야구협회 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회장 등 이 회장 표현대로 ‘돈 버는 명함보다 돈 쓰는 명함’이 더 많다.

전문 경영인에서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한 그는 점심식사 후에 반드시 30분 쪽잠을 즐기고, 하루도 빠짐없이 손·발 전용 크림을 바르는 것이 건강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대전고 출신 CEO를 말할 때 임동일 동부건설 물류부문 부회장도 빼놓을 수 없다. 27년간 몸담았던 삼성을 떠나 지난해 동부그룹과 인연을 맺은 임 부회장은 업계 최고의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센트레빌’의 브랜드 파워를 발판으로 주택부문에서 업계 최강자로 발돋움할 계획이다.

임 부회장은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영 스타일, 즉 ‘감성경영’으로 정평 나 있다. 그가 일본 MK택시회사 직원들이 얻는 최대 보상을 자부심이라고 누차 강조하는 것도 직원 개개인이 스스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면 자연스럽게 1등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임동일 동부건설 부회장 ‘감성경영’ 화제

임 부회장은 감성경영의 일환으로 다양한 이벤트를 활용한다. 2006년 초 동부종합연수원에서 열린 ‘2006년 건설·물류분야 확대전략경영회의’를 시작으로 ‘동부가족잔치’를 갖고 가족이 보내는 영상편지 시청, 가족 초청행사, CEO의 꽃다발 증정식, 노래경연대회, 응원대전 등의 이벤트를 마련해 동료 간의 마음의 벽을 조금이나마 허물 수 있도록 했다.

시무식에서는 사옥 현관 앞에서 임직원과 일일이 악수하며 첫 출근을 격려하고, ‘나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접착식 메모지를 선물로 건네면서 덕담을 전하는 등 먼저 부하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또 ‘밝은 미소, 밝은 인사가 밝은 동부를 만듭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전 임직원이 서로 밝게 인사하는 ‘인사 캠페인’을 실시해 언제나 밝게 웃는 밝은 기업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주말이면 틈틈이 전국 방방곡곡의 현장을 방문해 현장 직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사무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동부의 한 관계자는 “중요한 안건이 있으면 직원들과 도시락회의를 열어 편안한 분위기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직원들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경영자”라고 전했다.

▶(왼쪽부터) 이인구 계룡건설산업 명예회장, 이인호 신한금융 사장, 임동일 동부건설 부회장, 최용묵 현대엘레베이터 사장

그는 “고품질 소량생산을 중심으로 한 ‘명품전략’ 결과 서울 대치동 동부 센트레빌이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로 인정받게 됐다”며 “이제는 내실을 중시했던 경영 방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조 원 안팎에 머물러 있는 건설부문 매출을 2010년까지 3조 원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명품의 대량생산이 새로운 경영 목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임 부회장은 동부건설의 명품 브랜드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동부건설은 지난 2월 아파트 실수요자인 주부들이 참여하는 명품 주택연구회 ‘명가연(名家硏)’을 설립해 주부들의 제안을 상품 개발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임 부회장 자신도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홈페이지에 실린 고객의 요구사항을 수시로 점검해 회의 때 이를 반영하도록 하며 홈페이지 임직원 참여마당을 통해 이를 즉시 직원들에게 알리기도 한다. 이와 함께 유럽 선진 주택 및 밀라노 가구전시전 등에는 반드시 직원들을 파견해 새로운 경향을 파악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유화를 그리는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전시회도 몇 차례 여는 등 전문 화가 못지않은 그림 실력을 갖춘 임 부회장은 “미대에 다니는 딸에게 ‘너는 미대에 다니는 녀석이 그림 그리는 것을 통 못 봤다’고 했더니 ‘아빠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미대생이면 다 화가라고 생각하느냐’는 답이 돌아오더라”며 “시대의 추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면 딸과의 대화조차 어려운 세상인데 기업과 고객은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고 했다.

그는 최고의 서비스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일본 MK택시회사를 예로 들며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많은 고통이 따르지만 결국 자부심이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상으로 직원 개개인에게 돌아온다”며 “그런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최고경영자(CE0)의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동부고속 등 물류부문도 담당하고 있는 임 부회장이 MK를 통해 명품 서비스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임 부회장은 톱 10 진입 달성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품 브랜드 파워와 함께 현장경쟁력 강화를 누누이 강조한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그는 건설현장을 일일이 방문해 현장 직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애로 사항이나 문제점이 있으면 바로 시정 조치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전고의 교훈인 순결·진실·용기.

1956년 졸업생 은행장 3명 배출

그는 “일본 도쿄(東京)의 신주쿠(新宿)에 가면 ‘모리비루(모리빌딩)’라는 건물명이 많이 눈에 띄는데, 일본은 편의점처럼 빌딩도 설계에서 시공은 물론, 운영까지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렌차이즈 형태로 운영된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부동산 개발사업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동부건설은 종합 부동산 개발회사로의 도약을 위해 부동산 전문 금융사 설립과 컨설팅 부문으로의 진출도 추진할 계획이다.

대전고 출신들의 기업분야 활약상은 이처럼 대단하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대전고 최대의 인맥은 역시 금융권에 형성돼 있다. 대전고의 금융계 인맥이 최근 들어 다소 위축됐다고는 해도 대전고는 정·관계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MK(목포·광주)의 세력이 약했던 금융계를 장악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른 인맥과 달리 파벌을 형성하거나 공생하는 등의 관계를 구축하지는 않은 점이 특이하다.

대전고는 금융정책과 금융감독의 최고 당국자인 재정경제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여럿 배출했다.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은행장 출신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찰 정도다. 나웅배 전 부총리를 필두로 대전고 출신들은 국내 금융인맥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해방 후 금융업과 경제부처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면 금융인의 역사는 금융관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90년대 나웅배 부총리, 이규성 장관, 2000년대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등은 한국 금융사와 맥을 같이해 왔다.

출발은 1950년대부터였다. 당시 대전고 졸업생들은 대거 명문 대학의 경제학과·경영학과 등 상대로 진학했다. 옛 한일은행에서 상무와 감사, 옛 충청은행에서 은행장까지 지낸 최동열 씨는 “1956년도 대전고 졸업생 350여 명 중 상대에 입학한 이들이 33명으로 10명 수준에 머물렀던 그 전과 비교하면 상대 선호도가 3배 이상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의 동기 중에서는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 배찬병 전 상업은행장 등 은행장이 세 명이나 배출됐다. 이들은 1990년대에 나란히 은행장으로 뛰면서 대전고 출신 금융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전 총재는 1990년에 산업은행 총재로 일했고, 배 전 행장과 최 전 행장은 1998년 나란히 은행원들의 꿈인 은행장에 올라섰다.

대전고 출신들이 금융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연고보다 실력으로 내공을 다져 놓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지연과 학연을 따지는 당시 풍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은행같이 시험을 치러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을 선호했다는 것.

전경련에서 출발해 한국에 창업투자회사가 생겨나는 데 큰 역할을 한 대전고 한 동문은 “동기들이 대부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과 원칙에 어긋난 일을 하는 것을 꺼렸다”며 “빈틈없이 꼼꼼해야 인정받는 금융업에는 이런 기질이 필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성 전 장관과 그 형제들은 충청 제일의 명가를 일궈낸 것으로 유명하다. 1988년과 1998년 10년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장관을 지내 관운을 타고났다는 평을 받는 이 전 장관은 부하 직원들에 대한 애정과 온화한 성품, 꼼꼼한 일처리로 재무부 출신 후배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장관으로 꼽힌다.

이 전 장관의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제2의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며 쓴소리를 내뱉은 스티븐 마빈도 위기 극복과 예방에는 이 장관의 몫이 컸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며 “JP가 총리 인준을 못 받았을 때 총리대행으로서 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대전고의 한 동문은 1998년 당시 재경부 직원들이 거듭된 밤샘근무 때문에 가정생활조차 어렵다고 호소하자 이 전 장관이 직원 가족들을 과천 청사로 초청해 ‘아버지와 남편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느냐’고 다독인 일화를 소개했다. 1980년대 말 한국은행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는 대전고 동문인 김 건 당시 한은 총재와 수차례 독대해 진솔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전 장관의 동생 중에는 이규홍 전 대법관이 있다. 1990년대 말 이 전 장관이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이라는 메스로 기업들을 해부하면 당시 서울지법 민사50부 부장판사를 맡고 있던 이 전 대법관은 수술대에 선 기업들을 진찰하고 되살려줘 당시 경제의 양지와 음지를 지휘하는 양대 수장으로까지 꼽혔다. 이 외에 이규승 씨와 이규왕 씨는 각각 충남대 농대 교수와 명지대 화학과 교수를 지냈고, 이규방 씨도 국토연구원장에 오르는 등 형제 모두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대전고는 1951년 미군의 실화로 교사가 모두 타버린 뒤 새로 건물을 지어야 했다.

이인호 신한금융지주 사장이 금융인맥 대표 주자

보험업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전영회 전 교보자동차보험 사장과 이종업 전 LG화재 전무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은에서 출발해 외환카드와 한길종금 대표이사를 지낸 염동희 씨와 이강천 전 동양그룹 기조실 감사, 김대중 전 SK투신운용 감사도 대전고 금융인맥의 큰형님으로 통한다.

이밖에 오갑수 SC제일은행 부회장이 금융감독원에서 부원장을 지냈고, 한국공정거래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김 용 전 공정위 상임위원은 경제기획원 인맥을 대표한다. 학계에는 김시중 고려대 명예교수와 신극범 전 대전대 총장, 유장걸 제주대 교수 등이 있다.

대전고의 금융계 인맥을 이어가는 인물로는 이인호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대표 주자로 들 수 있다. 최근 LG카드 인수 계약을 통해 도약의 날개를 단 이 사장은 전형적인 융화형 CEO로 대전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82년 신한은행 개설준비위원을 지낸 후 신한은행장, 신한은행 부회장까지 오른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장은 2003년 신한은행장 연임에 실패한 이후 다시 중책을 맡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2005년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 사장은 IMF 외환위기 시절 은행장을 맡으면서 보여준 위기관리 능력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이 행장은 인력구조조정을 비롯해 지금의 튼튼한 신한 조직을 일군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이 사장은 대전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업은행·대구은행을 거쳐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서소문지점장·융자부장·명동지점장·영업부장 등을 두루 거친 후 1991년 이사, 1993년 상무이사로 승진해 연임한 다음 1997년에는 전무이사로 발탁됐다.

1999년 2월 라응찬 회장의 은행장 퇴임 때 곧바로 은행장 자리를 물려받은 후 2000년 3월 연임해 근무하다 2003년 3월 ‘내 역할은 다했다”라는 말과 함께 후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신한지주의 비상근 이사를 역임하다 2005년 다시 사장으로 선임됐다. 신한은행 창립 초기부터 영업 최일선에서 근무하면서 강한 추진력과 빈틈없는 업무처리로 정평 나 있으며, 고객과 영업현장을 최우선시하는 철저한 영업통이자 정통 뱅커다.

지점장 시절에는 발로 뛰는 지점장상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업적평가에서 2회 연속 ‘대상’을 수상한 진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권에 불어닥친 후폭풍을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오늘의 신한은행이 있도록 토대를 다지는 등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과 검증된 리더십을 갖췄다는 것이 금융계의 일반적 평가다.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 파벌 금지, 성과보상문화 등 조직 관리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소신을 지녔으며, 평소 직원들의 복지후생에 관심이 많아 은행장 재직 때 국내 최초로 직원만족센터를 설치했다. 퇴근후 부인과 함께 집 근처 호수공원을 자주 산책하는데, 인사하는 직원들을 위해 늘 음료수 값을 챙겨 다닐 정도로 자상한 성품을 지녔다.

LG카드 매각이 완료되면 이인호 사장과 ‘한솥밥’을 먹게 될 박해춘 LG카드 사장과 강홍규 부사장도 대전고 출신이다. 특히 파산 직전이던 LG카드를 업계 1위로 다시 복귀시켜 놓은 박 사장의 활약은 눈부시다. 박 사장에게는 ‘배짱과 뚝심의 경영자’ ‘구조조정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그동안 부실기업을 우량기업으로 전환시킨 성과를 시장과 업계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성화재 시절 복잡하기로 소문난 보험 계리 업무와 보험 마케팅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다. 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때로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를 쫓아가기에 지친 부하 직원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바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후 20조 원가량의 부실 덩어리를 안고 있던 서울보증보험을 맡아 5년 만에 우량 회사로 탈바꿈시키며 ‘기업 회생의 전문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당시 그의 실력을 눈여겨본 모 외국계 보험사가 파격적 조건을 내걸며 스카우트를 제의해 왔지만 직원들과의 의리 때문에 거절한 일이 아직도 서울보증보험에서 회자하고 있다.

LG카드 정상화 주역 박해춘 사장

프로로서 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2004년 3월 침몰 직전이었던 ‘LG카드호’의 선장으로 취임한 일. 부실만 6조 원에 달했던 LG카드를 부임 2년 반 만에 연간 1조 원 이상의 흑자를 내는 우량 금융회사로 만들어 놓았다. 그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저버리지 않은 셈이다. 그는 LG카드를 국민경제의 골칫거리가 아닌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카드회사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사장직 제의를 받아 취임할 때까지 한 달 가까이 LG카드를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밤잠까지 설쳤습니다. 병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에 근거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고는 회사를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사장은 LG카드를 맡을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2년6개월 동안 쉼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6조 원의 어마어마한 부실을 안고 있던 회사를 흑자 회사로 만든 것은 그의 저돌적인 추진력과 직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부임할 당시의 LG카드의 상황을 “한마디로 난리가 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LG카드는 한 달에 수천억 원이 들어가고 금융시장에도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제게 부과된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을 못 잤습니다. 사장 내정에서 부임까지 한 달 동안 LG카드가 어떻게 깨졌는지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서울보증보험에 근무할 때의 회생 경험 등을 고려해 맥을 잡아나갔습니다.

근원적 치료 없는 땜질식 처방으로는 병이 재발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명의는 병의 근원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임기응변적 대응보다 근원적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임할 때 LG카드 문제 해결책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속전속결로 구조조정을 감행했습니다. 인력구조조정이 아닌 상품·시스템·관리부문을 구조조정한 것이지요. 이 같은 구조조정에 힘입어 빨리 선회한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조직구조조정과 철저한 채권추심만이 LG카드의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채권추심을 강화하고 마케팅을 우량 고객 위주로 벌이자 연체율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취임 6개월 만에 175억 원의 순익이 났다.

이 같은 구조조정 효과가 점점 나타나 순익규모는 시간이 흐르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LG카드는 이제 연체율 한자릿수, 실질회원 965만 명의 우량 카드회사로 거듭났다. 올해 말까지 사상 최대의 순익을 기록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박 사장은 “채권금융기관들의 지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임직원이 똘똘 뭉쳐 노력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 같은 이익을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내년, 내후년에도 탄탄한 이익을 낼 수 있는 체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박 사장은 업무에서는 불도저처럼 강한 추진력을 보이지만 직원들에게는 세심한 배려를 아까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다. 수시로 직원들에게 CEO 메시지를 보내 신바람나는 회사를 만들자고 강조한다.

올 초에는 과장 승진자 부부를 동반 초청해 격려하는 행사를 연 것은 물론 직원들의 결혼기념일에는 직접 축하 엽서를 보내기도 한다. 추석 때는 전 직원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귀성을 기원하는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를 깜짝 선물로 보냈다는 후문이다.

대전고등학교는…

1951년 겨울 화재로 위기…不義 못 참는 ‘양반 후손’ 길러내

대전고는 1917년 일제가 설립한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실로 출발했다. 학교로서의 제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이듬해 대전중학교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일제가 물러간 뒤 대전중학교는 미군정으로 운영권이 넘어가 다시 개교했다.

당시 4년제였던 대전중학교는 해방 후 첫 졸업생 53명을 배출하고 야구부를 창설하는 등 명문 학교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졌다. 1950년에는 학제가 3년제로 개편되면서 고등학교로 인가받았다. 지금의 ‘대전고’가 공식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인근의 인재를 그러모으며 충청지역 대표 명문으로 성장하던 대전고는 1951년 겨울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미군의 실수로 학교에 불이 나 모든 건물이 타버린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와중에도 대전고는 수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인근 군수물자 생산 공장 건물을 빌려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히려 대전고는 화재를 계기로 낡은 교사를 재정비하고 교훈과 교가를 제정하는 등 본격적인 도약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1960년은 대전고 동문들이 잊지 못하는 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기붕 씨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경찰과 공무원을 선거에 동원하고, 군소 정당 후보들의 입후보 등록서류를 강탈하는 등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있었다.

양반의 후손들이라는 대전고 학생들이라지만 불의를 보고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60년 3월8일 대전고 1학년과 2학년 학생 1,000여 명은 대전 시내 전역에서 어린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 것과 부정선거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전국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며, 3·15의거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우리 헌정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일환 월간중앙 기자 whan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