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도박도 목숨 거는 도박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우리나라 조선업은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전 국민이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산업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과욕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강력한 리더십과 개척자 정신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심에 산업 발전에 사활을 걸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이라는 걸출한 사업가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타는 의지가 울산 앞바다를 한국 경제의 전진기지로 만들었고, 지금 세계 조선업 1위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부터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기를 연재한다. 그의 불굴의 투지가 CEO들과 독자에게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 조선업계가 2006년 9월 15일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세계 최강 조선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도 변변한 기념일이 없었는데, 2004년 국내 조선업 수주가 1000만GT를 달성한 9월 15일을 기념해 ‘조선의 날’을 제정하고 제3회 기념식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의 위용이 어떤가. 세계적인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영국의 클랙슨이 발표한 세계 조선소 순위에서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이 1위에서 5위까지 독식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대표’ 산업으로 조선은 전자와 함께 굴절 없는 성장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200억 달러 수출 고지를 돌파하고 동시에 수주액도 4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한 실적을 기록했다.

“배 건조가 토끼 임신보다 빨라”

한국의 조선업이 양적인 성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조선업계를 긴장시킨 지 오래됐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조선업계가 꿈꾸어오던 무(無)도크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무도크 건조 현장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 것이 2004년 10월.

현대중공업이 러시아 노보십에서 수주한 10만5000t급 원유 운반선을 육상에서 건조해 진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도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인식을 일거에 가능한 현실로 증명해보인 것.

한국 조선업의 기술적 향상은 특수선 제작에서도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새 ‘꿈의 상선’으로 불리는 1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시대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1만TEU급(1TEU는 길이 20피트 컨테이너)이라면 통상적으로 컨테이너 박스 1만 개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이다. 갑판 면적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2배가 넘는 초대형으로 추측하면 된다.

세계 최초라는 말을 하도 여러 번 써서 이젠 싱겁다고 할 정도가 됐지만 또 한번 이 기록을 경신하는 초유의 사건을 현대중공업이 저질러버렸다. 1만2000TEU급 컨테이너선 개발을 어느새 끝냈다고 발표했다. 기술적 성장세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누구도 예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세계적인 선주들이 남긴 말이 있다.

“현대중공업 제1야드에서 제2야드를 다 돌아보기도 전에 벌써 세계 기록이 경신되는 것 같다. 배를 건조하는 게 토끼가 임신을 시키는 것보다 빠르고 번갯불로 찍어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선업계는 여기서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황무지처럼 내버려두었던 요트 건조에 뛰어든 것이다. 막강한 조선 기술에다 정보기술(IT)을 결합한 고부가 제품을 만들어 요트 분야까지 석권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얘기다.

요트는 레저·경기용 딩기(Dinghy: 6m 이하) 급과 연안·대양 항해용 크루저(Cruiser) 급으로 나뉜다. 현재 세계 요트 시장은 미국(2만여 척)과 프랑스(8000여 척)·영국(3000여 척)이 주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요트 시장이 2004년에 151억 달러(약 14조원) 정도였지만 2010년에 이르면 210억 달러로 예상된다고 했다. 이 엄청난 시장을 우리 조선업계가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한국의 조선 산업 성과는 분명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야심 찬 의기투합에서 그 질주의 시동이 걸리게 됐다고 해도 무리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이 나라 조선 산업을 부흥시킨 주역이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고 할 때 부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을까? 기자가 조선소와 관련해 정주영 회장을 만나 취재한 것은 꽤 오래 전이다. 조선 산업의 태동기부터 듣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는 86년부터 92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이다.

▶거제도 조선소 전경.

조선 大國 만든 두 사람

지금은 비교도 안 되는 규모지만 세계에서 7개국밖에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50만t급 조선소 건설을 우리 정부에서 계획했던 것이 1972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한국의 산업 형태를 중화학공업으로 선회하지 않으면 미래의 산업 중흥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조선소 건설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하하하.”

당시 정부는 조선소가 완공되면 연간 2억5000만 달러의 외화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전망을 했고, 그 시점에 우리나라 수출 총액이 11억73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춰볼 때 엄청난 금액인데, 과연 조선 산업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겠습니다. 그 중차대한 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이 회장님에게 추진하라고 할 때는 각별히 당부한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당부고 뭐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잽힌 거지요. 못 피우는 담배까지 대통령 앞에서 뻑뻑 피워대면서 버티기도 했고 말이지요. 담배는 대통령이 피우라고 주시니까 피할 수 없어서 피웠지만. (웃음 속에서 잠시 회상하다가) 사실은 조선 산업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그 얘기하면 내용이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고 있는데, 처음에 박 대통령이 고민을 무척 하셨습니다. 1, 2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수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16년 동안이나 끌어왔던 무역 및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도 하지 않았어요? 근데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사력을 다해보았지만 GATT에 가입했어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 당시 경공업 중심의 노동집약 산업으로는 수출도 어렵고 경제 성장의 한계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돌파구는 중화학공업을 추진해야 된다, 그렇게 판단하신 거예요. 그래서 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화학공업을 가시적으로 역동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그러자면 우선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되는 게 뭐냐, 그게 조선이니까 1단계로 조선 산업을 선택한 겁니다.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해요. 조선 산업을 하게 되면 물론 초기는 단순한 조선 공업 수준이 된다 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 거거든? 거대한 조선소를 만들고 초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만 있게 된다면 일시에 기계·철강·전기·전자·해운 등 수많은 연관 산업을 급성장시킬 수 있잖아요. 그걸 내다보신 거지요. 대단한 양반이셨지요.”

박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정부로부터 조선 산업에 대한 구상이나 정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들으신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구요, 그냥 정부가 처음에는 4대 핵공장(4大 核工場)을 한다고 그랬어요. 4대 핵공장이라는 건 핵폭탄을 만드는 공장이 에이구요, 1968년에 박 대통령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 제철·종합기계·석유화학·조선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설정하고 최대한 정부가 중점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잖아요? 그게 4대 핵공장이지요. 그래가지고 조선소 얘기도 나온 건데, 첨에는 김학렬(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씨가 운을 뗐어요.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었지요.”

▶1977년 현대중공업을 방문한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명예회장. 두 사람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조선 대국으로 성장시킨 거목이다.

“도망치려다 잽힌 것”

왜 회의적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조선소가 그냥 됩니까? 사람들이 울산에 현대조선소를 보러 와서는 얼마나 어렵게 건설했는지도 모르고 본래부터 조선소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해서 그냥 웃었지만, 조선소 얘기가 나온 그때만 해도 부산에 ‘대한조선공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대충 1만여t급 배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게 창업 이래 계속 적자를 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파산하고, 파산 후에는 한진으로 넘어갔는데 생각해 보세요. 대한조선공사가 한번도 흑자를 보지 못하고 파산했을 정도니까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겠어요? 결코 쉬운 게 아니지요. 물론 조선기술자라는 것도 없었고 말이지요.”

그런 정도의 국내 여건에서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말씀입니까?
“(회고해 보니 기막힌 시작이었기 때문인지) 허허헝, 도박도 돈을 거는 도박이 에이고 명(命)을 거는 도박이에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고비가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하여간 정부의 강력한 의지도 있었지만 내가 반대를 하니까 하루는 김학렬씨가 대통령께서 찾는다는 겁니다. 그럴 땐 판단이 빨라야 해요. 아이고, 도망이다 하구선 도망갔다가 잽혔지요, 하하항. 근데 대통령의 의지가 여간 강하신 게 아니에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첨에는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워낙 눈빛부터 무서우니까 그러면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지요. 그런데 조선소를 하려면 뭣보다 차관을 얻어야 해요. 우리도 그만한 돈이 없고 정부도 돈이 없으니까. 그러니 차관을 얻으려고 이웃부터 다녔어요. 미국이 우리하고 가깝지 않습니까? 일본하고 미국을 열심히 찾아대녔습니다.”

반응이 냉담했을 것 같은데요.
“일본이나 미국이, 너희는 후진국이고 그런 배를 만들 능력이 없다, 그렇게 나와요. 한번 시작해보겠다 했는데 그렇게 나오니까 영 맥이 풀려서 발길이 안 떨어져요. 그렇지만 한두 번 거절당했다고 멈출 수 있어요? 다시 여러 사람 찾아대녔는데 결국 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다시 대통령을 만나서 여기저기 다녔던 얘기를 하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랬더니 ‘도망가지 마시오! 절대 해야 돼!’ 이러시면서 호통을 치시잖아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이코노미스트 872호>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