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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밭갈이」지휘하는 선거사령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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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선거대책본부장은 선거의 야전사령탑이다.
정당의 기본 존재이유와 목표가 정권창출이라는 점에서 선거 지휘탑을 맡는 본부장은 화려한 각광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선거본부장은「킹 메이커」「프레지던트 메이커」(대통령 제조자)로서의 부러운 명성 속에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는다.
대통령 후보로부터의 돈독한 신임, 우수한 능력, 우월한 경력을 갖춘 인물이 본부장을 맡게 돼 있어 정치인으로선 대권도전에 못지 않은 성취감과 독특한 경험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바로 대권후보자의 정치적 연기를 뒷받침하고 이미지를 관리하는 정치예술의 최고연출자로서의 관록이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 경력자들의 자부심이다.
국회의원 선거대책본부장은 그야말로 총선의 모든 것을 조정한다. 조직·자금·선전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어 금배지를 단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선망의 자리다.
국회의원선거 본부장은 대개 각 당의 사무총장이 맡아 왔지만 선거를 치러본 본부장 경력의 사무총장과 평상시의 사무총장은 전쟁경험을 가진 사단장과 평화시의 사단강의 차이처럼『지내보지 않고는 쾌감과 고통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예술 연출자>
역대 본부장 중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시절이 지난 87년 12월에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유신과 5공을 거쳐 16년만에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았던 그때의 선거본부장들은 저마다 킹 메이커를 꿈꾸며 혼신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1노3김이 붙은 13대 대선의 본부장은 이춘구(민정·노태우)김재광(민주·김영삼)이중재(평민·김대중)김용채(공화·김종필)의원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든 사람」,「노태우 군단」을 이끈 이춘구 본부장은 조직·자금·선전 등 3권을 틀어잡고 특유의 치밀한 지휘력으로 신속한 판단과 결정을 통해 노 후보가 마음놓고 유세현장에서 뛸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조직적·과학적인 선거기법을 본격 도입했으며 ▲기획·조직 ▲홍보·유세 ▲직능·수도권 ▲종합기획단 및 상황실운영 등의 사례들은 대통령선거의 성공적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의 이토추그룹을 재조직한 세지마 류조가 대본영 참모 경험을 활용했듯 그의 군대경험이 최대한 활용됐다.
여당의 경우 현직 사무총장이 본부장을 맡는 관례에서 볼 때 당시 전직 사무총장인 이 의원이 본부장을 맡은 것이 이례적이었지만 이미「유일한 대안」으로 그의 조직장악력과 판단력은 평판을 받았다.
그는『선거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기획하고 기획물을 추진, 집행하고 현실에 적용해 가는 과정에서 맞지 않는 점을 순발력 있게 변경, 재추진하는 일을 했다. 과거 공화당시절직선 전략을 참조하면서 특히 최신여론 조사 등의 과학기법을 동원했다』고 회고했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은 나중에 엉뚱한 컴퓨터 부정 시비를 일으킬 정도였으며 3김 동시출마가 가장 이상형임을 확인하는 등 다양한 가상 시나리오, 인원동원과 짜임새에서 전무후무할 것으로 보이는 12월12일의 여의도 유세 등은 그가 발군의 선거전략가임을 과시했다.
선거대책본부장을 거쳐 대통령취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두 차례 사무총장·내무장관을 역임했고 필요할 때마다 대통령의 자문을 맡는 권력의 핵심부에 언제나 위치하게 됐다.
YS(김영삼)의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낸 김재광 의원은 당시 야당가의 산전수전을 겪은 선거의 베테랑으로 정평을 얻고 있었다.
5공의 분기점이 됐던 85년2·12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던 시절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노련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YS의 직계가 아니었다. 때문에 YS의사조직에서 기획한「군정종식」등 이미지 메이킹 등 야당특유의 바람몰이 선거전략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뒷전에 밀려 있었다.
YS가 초반우세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선거참모간의 갈등과 말썽으로 전략에 차질을 빚은 것은 선거대책본부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YS는 밖에서 영입한 그에게 선거대책본부장의 중책을 주긴 했지만 선거대책본부가 자리한 중앙당은 자금·조직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YS의 상도동과 민족문제연구소, 그의 비밀사무실에서 조직되고 기획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는 그후13대 국회 들어 국회부의장 감투를 쓰고 있으며 지난해 7월 방송법 날치기 파동 때 본회의장 사회를 본 것이 그의 새로운 경력으로 추가되었다.
김대중 진영의 선거를 지휘한 이중재씨는 논리적이고 숫자에 밝은 재정 통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지역구에서 나름대로 조직의 일가견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이 본부장 역시 동교동사단에 사실상의 지휘봉을 빼앗겼다.
동교동의 김대중 직계들은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함께 한 투사들. 이들이 선거의 모든 것을 관장했으며 사실상의 선거대책본부장은 김 총재 자신이었다. 조직의 모든 것을 김 총재가 지시했고 수백만원대 자금도 일일이 김 총재의 손을 거쳐야 나갈 수 있었다.
평민당도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총재의 사조직과 공식적인 선거대책기구가 나뉘어 내부갈등을 겪었다. 두 김의 오랜 카리스마나 개인조직 역량이 빚어낸 자가당착이었던 셈이다.
김용채 의원은 국민당에서 JP진영에 합류, 본부장을 맡았고 지역구를 옮겨 정치적 경력을 계속 낳고있으며 현 국회 건설위원장으로 JP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있다.

<사조직과 갈등도>
이런 것들은 선거대책본부장과 후보간의 관계, 선거기구의 운영방법 등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71년4월27일 박정희(공화)-김대중(신민)후보간의 7대 대통령선거는 김 후보의 선제정책공세로 선거의 질적 수준을 높였으며 그만큼 대책본부강의 비중이 컸었다.
「40대 기수론」으로 야당 쪽에서 먼저 불어온 바람을 막기 위해 공화당은 서울을 전담할 기구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수도권 특별대책의 개념과 전략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공화당은 백남억 당의장을 선거사무장으로 길재호 사무총장을 선거사무소장으로 임명했다. 백 의장은 전국 순회 유세 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중앙참모진영을 이끈 것은 길 총장.
특히 전국을 이원조직화해 수도권대책을 서울전담 기획실이 중앙당과 동등한 입장에서 치렀는데 강성원씨가 맡았다.
길씨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활동으로 보증수표란 평가를 받았으며 집권당 사무총장의「전형」을 보였다는 평가를 남겼다. 육사8기로 5·16주체였고 화려한 정치가도를 달렸지만 71년 10·2 항명파동으로 4인 체제의 같은 김성곤씨와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
신민당은 김대중 후보와 오랜 기간 파벌을 함께 해온 선임자인 정일형씨가 본부장을 맡아 김 후보의 다양하고 기발한 선거전략을 뒷받침했다.
그가 9대(71년)때 기록한 국회의원 8선의 최다선 경력은 지난 85년 총선 때 비로소 김영삼 현 민자당 대표가 타이기록을 올린 것에 비쳐볼 때 소중한 기록이기도 했다.
5·16후 63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에서 현대적인 선거운동 방법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박정희 후보진영은 장경순 사무총장, 윤보선 후보(민정당)진영은 전진한 최고위원이 맡았다.
장씨는 5·16주체세력으로 예편(중장)후 정치에 입문, 10년간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전씨는 제헌의원,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으며 당시「국민의 당」파동 등 야당 분열양상을 치유하는데 전력했다.
67년 박 대통령 재선 때는 길재호씨가 처음 본부장을 맡았다. 길씨는 그후 국회의원(6·8)선거 때 압도적 다수로 의석을 획득, 3선 개헌의 바탕을 마련했다.
윤보선 후보측에선 재야에 있었던 장기영씨가 본부장 일을 해냈다.
장씨는 허정과도 정부시절 2개월간 서울시장을 지내 지난2월「수서」로 2개월만에 물러난 박세직씨보다도 짧은 최단명 시장을 지냈다.
자유당시절의 56년 정·부통령선거 때 이승만 후보 진영에선 박영출씨(2, 3대의원), 민주당은 최고위원 중심으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측에선 윤길중 간사장(현 민자당 의원)이 선거본부장으로 활약했다.
52년 선거 때도 조 후보의 사무장이었던 윤씨는『정책대안을 본격적으로 내놓아 정책대결의 측면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선거대책본부장이 무력했던 시절은 간선제때로 12대 대통령선거. 민정(전두환), 민한(유치송), 국민(김종철) 민권(김의택)후보를 놓고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한 당시 민정당은 권정달 사무총장이, 민한당은 신상우 총장이, 국민당은 김영광 총장이 본부장을 맡았다.
규격정치, 1·2·3중대 정당시절인 이때의 본부장 역할은 미비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선거 본부장에 못지 않게「공천」의 묘미 때문에 탐내는 자리가 국회의원선거 대책본부장. 4년마다 선거가 돌아오므로 실력에 못지 않게 정치「운」이 있어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야당 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는 71년 8대 선거로 역대 국회 중 의석 수에서 가장 균형 있는 국회로 당시 신민당은 대선 패배와 당내갈등의 후유증으로 당수대행(김홍일)체제로 선거본부장을 운영했다.
유효 득표 율에서 신민당이 1.1%를 이긴 78년12월10대 선거는 유신 몰락의 출발이 되었으며 득표율 패배를 한 당시 공화당 본부장은 길전식 사무총장이었다.
길씨는 10·2항명파동이후 공화당의 새로운 실력자였고 육사8기 출신.
85년 2·12총선 때 민정당은 이한동 의원이 본부장을 맡았고, 제1야당 민한당은 조윤형, 신민당은 김재광, 국민당은 조일제씨가 맡았다.
김씨는 40여 억원의 당신거지원금을 3등급으로 차등지급 하라는 주장을 일축하고 골고루 배분, 전국 당원의 사기를 진작시킨 결단을 내렸다.

<선거참패에 책임>
88년 4·26총선 당시 민정당은 심명보 사무총장이 맡았다.
심 총장은 당시 민정당이 공개 접수한 1천6백명 후보자에 대한 기초자료조사, 역삼동 안가(별도사무실)에서 대학입시 시험위원처럼 1주일간 공천심사위원들과 함께 은둔심사, 유세지원·자금배분 등『전투에 나갈 병력배치와 지휘·후방지원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 선거에선 여당의 대승이 예견됐으나 대통령선거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해 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과반수에 미달했다.
그러나 이때 권익현·권정달씨 같은 민정당 중진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큰 충격을 주었는데 공천 심사위 배후에 박철언 특보(당시)가 작용했다는 설이 있어 선거대책기구는 겉돈 인상이다.
심 총장은「대통령 제조군단」의 일원이며 언론인 경력으로 정계에 입문, 현재 민정계 핵심 중진의 하나지만「여소야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4·26총선 때 야당의 본부장(민주=김재광·평민=박영숙·공화=김용태)은 대통령에 떨어진 3김씨가 직접 뛰어다녀 그만큼 역할과 비중이 축소되었다.
6공들어 3당 합당이후 첫 전국적 선거인 이번 광역선거에선 민자(김윤환)신민(김봉호)민주(이철)의 각 당 사무총장이 지휘봉을 잡고있으며 이들은 각 당의 실세로 자리하고 있다.<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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