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전자산업 추격 못하면 기술 식민지 된다|미·유럽 대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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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걸프전에서 미사일을 잡는 미사일로 이름을 떨친 패트리어트미사일. 그 생산업체인 레이시언사는 원래 전자레인지를 만드는 가전회사였다.
이 회사는 80년대 초반 전자레인지의 핵심기술인 마이크로파를 미사일개발에 그대로 적용, 성공적인 업종전환을 했다.
하지만 레이시언 사의 업종전환은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여느 미 가전업체들처럼 일본상품에 밀러 도산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군수업체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첨단무기로 꼽히는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전자레인지-그만큼 가전기술의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그래서 가전 산업은 짧은 산업역사에 비해 각국에서 기간산업으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가전산업은 비디오(TV·VCR·캠코더)와 오디오·백색가전제품(세탁기·냉장고·진공청소기·가스레인지 등)을 통칭한다.
이런 세계 가전시장을 일본이 휩쓸고 있다. 90년 현재 총6백엔 억 달러 규모인 세계 가전 수출입물량 가운데 일본의 수출은 2백50억 달러로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세계2위로 90년 1백2억 달러 어치의 가전 제품을 생산해 55억3천만 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대일 무역역조와 반일 감정을 앞세워 높은 무역장벽을 쌓은 한국만이 살아남을 정도로 일본의 세계 가전시장 초토화 작전은 거세다.
70년대부터 일본의 공세에 시달려온 미국은 제니스사만이 가전분야에서 세계16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올렸다.
뿐만 아니다. 시장의 70%이상을 외국에, 그것도 대부분을 일본에 내준 외에 미 국민들의 꿈의 상징이던 컬럼비아 영화사와 MCA가 소니와 마쓰시타 사에 넘어갔다. 또 자존심의 상징이던 록펠러센터 등 미대도시의 노른자위를 중심으로 전 국토의 1%가 가전업체가 주력인 일본재벌들의 손에 넘어가는데 멀거니 지켜볼 뿐 속수무책이다.
80년대부터 일본이 본격 진출한 유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몇 해 사이에 일본은 EC가전시장의 30%를 석권했다.
네덜란드의 필립스사는 순전히 일본과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l년 동안 5만명의 종업원을 해고했다. 가전부문에서 유럽에서 유일한 흑자회사이자 프랑스 국영기업인 톰슨사도 마찬가지로 종업원을 무더기로 해고시켰다.
이런 위기의식에서 지난5월 초 자크 들로르 EC집행위원강의 주관 하에 톰슨사의 고메스 회장을 비롯, 필립스, 지멘스(독), 올리베티(이)사 회장 등 유럽전자업계 총수들이 프랑스 솔류 시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주제는「위기에 처한 유럽전자산업」.
참석자들은 3∼4년 내에 일본을 따라잡지 못하면 영원한 기술식민지로 전락할 것으로 진단, 『이제 우리도 일본식대로하자』며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EC시장보호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산업전쟁을 도발, 규칙을 먼저 위반했으니 우리도 규칙을 준수할 의무는 없다』는 감정 섞인 주장까지 터져 나왔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비밀회동을 전후해 유럽의 대 일본 반격전이 강하게 몰아치고 있다.
프랑스는 일본산 TV에 대해 수입쿼터를 새로 설정하는 한편 고선명(HD)TV의 개발을 위해 정부가 5억5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또 EC는 일본반도체와 가전제품, 고밀도 폴리비닐 등 각종제품에 대해 잇따라 반 덤핑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밖에 EC내부의 일본제품 이미지격하 바람도 거세게 불고있다.
「샤프 사 에어컨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 「일제휴대용 전화기가 폭발, 사용자의 얼굴 중화상」등의 기사가 유럽 언론에 비중 있게 소개되고 있다. 「일제=품질」이라는 뿌리 깊은 소비자 의식을 부수지 않고는 유럽업체의 현상유지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어 프랑스 등 유럽각국이 광고에 비교광고를 허용한 것도 본격적인 일제 이미지격하를 시도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란 분석도 있다.
유럽뿐만 아니다. 미국도 최근 일본산제품의 안전도를 문제삼아 가전제품·자동차등 주요수입상품에 대해 검사기준을 한층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수입제품의 클레임이 작년 한햇동안 50%가 늘어났다.
최근 미국은 대통령직속인 산업경쟁력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해 첨단기술 22개를 선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일·EC의 추격을 뿌리치려 하고있다.
그러나 한번 잃기 시작한 국제경쟁력을 다시 찾기 위한 미·EC의 이 같은 노력이 성공할지, 아니면 세계 무역마찰만 더욱 몰고 올 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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