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문화가치를 되살리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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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는 앞으로의 지자제 시대에서 빚어질지도 모를 무궤도한 고도 개발을 막고 옛도시들을 고유문화도시로 가꾸기 위한 「고도보존법」 제정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또 서울시는 최근 94년 천도 6백주년까지 남산의 옛모습을 되살리고 안기부와 수방사 자리에 조선시대 마을·옹기공원·전통공예관 등을 조성하는 「전통문화동네」 건립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는 우선 이같은 정부당국과 지방자치단체의 고도보존과 역사문화 환경의 복원계획을 그동안 경제개발 우선에 밀려오기만한 문화가치 인식의 전환을 알리는 징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경주·공주·부여·익산·김해 등과 같은 옛도시들은 신라·백제·가야시대의 많은 역사문화 유적들이 산재해있을 뿐만 아니라 기능중심의 현대도시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정서문화」의 보고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옛도시들의 개발이 그 역사문화적 환경을 잘 보존하고 고도로서의 품격에 걸맞도록 추진되기를 이미 오래전부터 거듭 당부해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고도개발의 여망을 뒷받침 할만한 제도적 장치나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거의 없는채 이들 도시에도 현대도시 개발모델이 그대로 적용돼 적지 않은 유적의 훼손과 고유의 역사문화 환경을 해치는 안타까운 예들을 자주 보아왔다.
우리는 고유 전통이 면면이 살아숨쉬는 유구한 고도 정서문화를 향유하는 문화민족임을 대내외적으로 자랑해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옛도시들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역사성을 뒤로한채 속도와 능률에 쫓기는 물량주의적인 개발을 추구,고이 간직해온 문화환경을 적잖게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의 고가도로 건설과 도로 확장사업에 밀려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원래의 자리로부터 뜯어 옮겨지고만 독립문과 대한문의 이전이다.
어디 이뿐인가. 앞의 고도들에서도 운동장을 만들고 공장을 짓는다고 유적의 철저한 지표조사와 발굴과정도 거치지 않은채 불도저로 마구 밀어붙여 땅속에 묻혀 있던 유적과 문화재들을 훼손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또 60∼70년대 개발지상주의 시절에는 동구의 장승과 성황당들을 일제식민사관의 연장선상에서 「미신」이라고 매도하면서 마구 파괴해 버렸다. 다행히도 80년대 후반부터 장승과 성황당이 중요 민속문화재로 재평가되면서 부활되고는 있지만 전래해오던 옛 장승과 성황당들은 끝내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비극은 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경제가치와 문화가치가 맞부닥치거나 경쟁할 때마다 「개발우선정책」으로 일관했던 정부당국의 문화인식 결여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정부당국의 고도보전법 제정추진이 민·관 모두의 잘못된 문화인식을 새롭게 바꾸는 일대 계기가 돼주기를 바란다.
문화란 단순한 골동취향적 장식품이나 상층구조를 이루는 인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지와 태도·행동방향을 결정하는 기본 인자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도개발에는 이같음 문화인식을 바탕으로 개발과 주민들의 경제적 이익간에 빚어질 갈등을 극복할 것과 보존 및 개발에 유의할 점 몇가지를 재삼 당부하고자 한다.
첫째는 70년대 경주 고도개발의 실패를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고도개발의 경험과 안목 부재로 시멘트 투성이 「복원」이 되고만 경주개발은 고도에서 가능한 정서문화를 만끽하기에는 거리가 먼 연목구어의 꼴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고도 고유의 정서문화 환경을 철저히 보존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발지구와 보존지구를 구분,기능중심의 신도시 개발은 고도 외곽지역으로 유도하고,개발지구의 건물설계·도로건설·색칠 등에도 전통과의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발휘해야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화도시로 개발되는 고도들이 현대도시 속에서 날로 척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정서문화를 새삼 꽃피워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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