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뒷돈 2억 받고 파업 풀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2003년 7월 29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20여㎞ 떨어진 경남 양산시 천황산 깊은 산속에 있는 한 암자.

당시 현대차 노조위원장이었던 이헌구씨와 회사 고위관계자가 단 둘이서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때는 현대차노조가 회사와의 임단협 갈등으로 파업에 나선지 한 달이 조금 지난 날이었다. 파업 대열에서 몰래 빠져나온 이씨가 회사고위관계자와 단독 대좌를 한 것이다. 만난 지 1시간여가 지나 산 아래로 내려온 이씨는 이 관계자에게서 현금 1억원씩이 든 서류가방 2개를 건네받아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사라졌다.

이씨는 하루 뒤인 30일부터 8월 5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어머니.동생 등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에 이 돈을 입금시켰고 노조의 파업은 입금 마지막 날인 8월 5일 끝났다. 6월 25일 시작된 당시 파업은 사상 최대 규모인 1조3100억원의 생산손실을 입혀 정부가 긴급조정권 발동까지 검토했었다.

검찰에 소환된 두 사람은 대질신문에서 회사관계자가 돈을 준 사실을 시인하자 이씨는 "배신감을 느낀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입을 닫았다. 울산지검은 16일 이 같은 혐의(배임수재)로 이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돈을 준 회사관계자에 대해서는 배임증죄 혐의가 인정되지만 공소시효(3년)가 지나 사법처리가 어렵다"고 말했다. 배임수재는 공소시효가 5년이다.

노조 기념품 납품 비리, 취업 비리 등 최근 노조 비리가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터진 이번 사건은 노조의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씨가 2억원을 받았던 당시 노조사무국장이었던 박유기 현 노조위원장에게도 금품수수 의혹이 쏠리고 있으나 박 위원장은 "노조 활동 17년 동안 회사로부터 봉급 외에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의 한 노조원은 "설마 했는데 파업을 부추겨 놓고 자기들은 회사 측과 뒷거래를 하다니…. 지도부가 내세우는 명분만 믿은 우리만 바보였다"며 분개했다.

◆잇따라 터지는 노조 비리=현대차노조 간부들의 도덕적 해이 사례는 취업.납품 비리, 사기 도박 등 다양하다. 2001년 9월 ~ 2003년 12월 10대 노조집행부(위원장 이헌구) 당시 노조 간부 20명이 파업.생산라인 정지 등의 협박을 미끼로 30여 명의 취업 희망자들로부터 7억8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 지난해 모두 사법처리됐다.

특히 이들은 본인과 부인은 물론 부모와 전처, 내연녀 어머니 명의의 계좌로까지 돈을 받은 데다 이 돈으로 증권 투자나 골프 비용, 부동산 투자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 주변을 놀라게 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 이모씨가 노조창립기념품 13억여원어치를 구입하면서 납품 업체와 유착한 사실이 드러나 업무상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박유기 현 노조위원장은 조기퇴진하기로 했으나, 성과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파업을 벌이며 위원장 권한을 유지하고 있다.

파업 중 노조 간부 등이 사기 도박으로 동료 노조원의 금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지난해 7월 19일에는 대의원 백모(40)씨 등 현대차노조 간부와 노조원 3명은 동료 노조원 2명을 사기도박판으로 끌어들여 특수 콘택트렌즈와 특수제작된 화투를 이용해 5359만원을 가로챘다가 구속됐고, 이모씨 등 노조원 5명도 같은 해 5월 같은 수법으로 도박판을 벌인 사실이 발각돼 지난 14일 구속됐다.

울산=이기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