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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31. 곗날 다음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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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KOREA'라는 책에 싣기 위해 외국인 사진기자가 찍은 것이다. 부산 피란길 때 옷차림 그대로 1950년 늦여름 해운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1950년 6월 24일,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저녁이 되자 억수같이 퍼부었다. 당시 여자들 사이에서는 '계'라고 불리는 모임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 비 오는 날은 곗날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계주에게 곗돈을 전달하러 갔다. 네 구좌의 곗돈이었으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이런 일을 두고 운이 없다고 하는 것인지, 다음날 바로 피란길에 나서는 바람에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곗날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야단이 나 있었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식구들은 모두 라디오 앞에 모여서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이 되자 먼 곳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남하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방송담화를 통해 "우리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모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당부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대책 없이 걱정만 하고 있는데 자정쯤 퇴근하신 아버지가 "얘들아, 미국 지원군이 곧 온다니까 걱정할 것 없어. 다들 어서 자도록 해라"고 하시고서는 잠자리에 드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컴컴한 방 안, 전화 벨소리가 울리더니 전화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곧 일하시던 방송국으로 떠나셨고, 어머니는 긴장된 표정으로 동생들을 깨우라고 하셨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서 이방 저방으로 다니며 동생들을 깨웠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밥을 지으라고 한 뒤 내 방으로 돌아와 '무엇을 가지고 피란을 가야 되나' 하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미국 유학을 갈 때 형부가 선물로 준 루비 목걸이 세트를 챙긴 다음 셔츠 스타일 블라우스에 블랙 개버딘 스커트를 입고 지퍼가 있는 단화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끈이 달린 여름용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화장대에 있는 화장품들을 쓸어 담았다. 다시 어머니 방으로 갔더니 어머니는 옷을 한 보따리 싸고 계셨다. '저 짐을 다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나…' 걱정에 잠겨있는데 아버지가 소형 트럭 한 대를 가지고 돌아오셨다. "서둘러라! 서울역으로 가야 돼!" 나는 얼른 부엌에서 쓰는 베 보자기를 펼쳐 뜸이 덜 든 밥을 솥째로 쏟아부었다. 그 위에다 짠지 두 개를 얹고 보자기를 묶었다. 다들 서둘러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싼 커다란 보따리를 방 안으로 집어 던지고 차에 올랐다. "왜 대건이가 안 보여!"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는 발이 아파서 피란을 안 가겠대."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날 대건이는 곪은 발을 수술하고 돌아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하고 대건이를 잡아 일으켜 옷을 입히고 차에 태웠다. 막내 해방둥이 대웅이를 끈으로 묶어 업고 마지막 점검을 한 뒤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했다. 우리를 태운 트럭이 서울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탄 기차가 공무원 가족들을 태우고 떠나는 막차였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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