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 밀무역·음주자는"효시"|일본간 조선 후기 통신사 행동 지침서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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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조선조 후기 일본은 오간 외교사절단인 통신사 일행이 행동 지침을 일일이 규정했던 「금제조·약속조」원본이 발견됐다.
재야서지학자 이종학씨(64)는 최근 통신사 일행의 행동지침 28개항이 기록된 희귀본 고문서를 입수, 공개했다.
통신사 일행의 행동 지침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통신사등록」이나 당시 일본을 다녀왔던 정사 조암의 기행문집「해차일기」등을 통해 학계 내에 알려져 왔으나 관에서 일행에게 준 문서원본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서에는 금제조 12개항과 약속조 16개항이 길이 2m·폭50㎝가량의 한지에 적혀있으며, 끝머리에 통신사 일행의 책임자인 정사·부사·종사관의 수결(서명)이 되어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는 특히 일행의 탈법행위를 가혹하리만큼 엄중히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문서는 4백∼5백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공식외교일행이라는 통신사의 특성에 따라 나라의 명예를 훼손하는 저속한 행위와 개인의 영리를 위한 밀무역을 극형인「효시」(효시:목을 잘라 나무 끝에 매다는 형벌)로 다루고 있다.
효시대상은 금제조 4개항. 제1항은『인삼을 밀무역한자는 법에 따라 효시한다』고 규정, 인삼밀무역을 최대 범죄시 했음을 알 수 있다. 2항은 비단 밀무역을 금지.
특히 주목되는 것은 3, 4항. 3항『술을 마신 자는 돌아오는 날 먼저 효시한뒤 보고한다』와 4항『여자와 내통해 외설스럽고 추잡한 행위를 한 자도 돌아오는 날 먼저 효시한뒤 보고한다』는 질서와 인륜도의를 죽음으로 지키고자한 당시의 유교적 윤리관을 보여준다. 12항은『저쪽 사람들에게 외설적이고 추잡하게 굴거나 예의를 지키지 못한 자는 곤장으로 엄중하게 다스린다』고 규정, 이 같은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이는 국가 비밀누설 등 더욱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는 범죄행위를『법에 따라 다스린다』고 규정한 조항들과 비교해 볼 때도 알 수 있다. 금제조 5항『응당 감춰야할 사항을 누설한 자는 돌아와 보고하고 법에 따라 다스린다』, 9항『병서 등 각종 서책과 문서 등을 누설한 자는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린다』, 10항『군사기물을 몰래 매매하는 자도 엄중히 다스린다』등으로「효시」보다는 덜 가혹하다.
이밖에 금제조에서는 금·은·진주 밀무역 등을 금지하고 있으며, 금지사실을 묵과한 통역관까지 같이 처벌한다고 규정해「불고지죄」가 엄격히 성립됨을 보여준다.
한편 다소 강제성이 약한 자율규정으로 추정되는 약속조에서도 유교적 인륜도덕과 질서가 집중 강조되고 있다.
약속6항은『상대방을 대할 때 스스로 체면이 깎이는 일을 절대 말아라』며 예를 중시했다. 13항도『자고로 아래위로 나이 많고 적음의 서열(장유차서)이 있으니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감히 모멸하지 말고 젊은이는 연장자를 공경할 것이며, 이를 어기면 곤장으로 엄히 다스린다』고 규정, 장유 유서의 유교윤리를 강조. 구체적 행동거지에 있어서도『저쪽사람을 대할 때 절대 경망스럽게 비웃거나 무시하지 말고 충·신·성으로 대해야 하며, 부를 때도「너」(여)등으로 하대하지 말고「일본인」이 불러라』(12항), 『육로에서 도급히 뛰다니거나 손가락질하고 비웃거나 노려보지 말라』(15항)등과 같이 품위와 예절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선물교환까지도 엄격히 규제,「많이 주고 적게 받으라」고 규정했다. 제l0항은『글씨·그림·의약품 등을 선물로 주고 받을 때 조금씩 손해본다고 생각해 후하게 보내고 박하게 받아라』고 규정했다. 11항은『돌아올 때 선물이든 상이든 모든 물품을 사람별로 장소별로 구분해 소상히 기록한 뒤 점검, 조사자료로 삼는다』고 규정, 작은 물건 하나라도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엄격한 규정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친 통신사 왕래중 초기의 금지 규정보다 한층 강화된 것으로 문서자체가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후기로 접어들면서 통제가 엄격해졌다는 것은 점차 기강이 허물어지고 밀무역이 많았다는 반증으로도 보여진다.<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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