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0)<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25)|이용상|기대 깨진 집단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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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늘 밤, 혼자 탈출하겠다』는 아라이의 일방적인 선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니라 고성능 폭탄이었다. 『그건 안돼. 절대로 안돼』나는 그의 입을 틀어 막었다. 그리고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강을 건널 때 총을 훔쳐 간 중국 꼬마 얘기를 아까 내가 했었지. 우리는 이제 탈출할 수 있는 지역까지 왔다. 그러니 조금만 더 남쪽으로 가면 탈출은 더욱 안전할거다. 그때 약속대로 다 같이 가자 구. 알겠지.』
그러나 그는 오늘밤 기어이 떠나겠다고 선언하며 홱 돌아서 가 버렸다. 그는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내가 장교가 될 욕심으로 일본군에 주저앉아 버릴 것으로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발각되기 쉬운 집단탈출에 위험을 느끼고 혼자 떠나려 든 가, 둘 중 하나였다.
그렇다. 불과 몇 시간 전 이제 중국 군 지역에 왔으니 함께 탈출하자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연 혼자 탈출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집단 탈출에 위험을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저만 살자고 혼자 가 버리면 남은 우리들은 죽어도 좋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라면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자기 혼자 가 버릴 것이지 왜 나에게 이토록 고뇌를 주는 것일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 아라이를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꿈이었다. 내가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 탈출했을까. 그렇다면 벌써 비상이 걸리고 일대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주위는 잠잠했다. 혹시 불침번이 잠이 들어서 아라이의 탈출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어차피 탈출한 아라이 라면 늦게 알수록 그에게는 유리하다. 그만큼 멀리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이의 침소에 가 확인해 볼까. 아니지, 그건 안 된다. 만약 일본법사의 눈에 띄면 그의 탈출을 내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했다.
이윽고 오전6시.『점호집합』이라는 구령소리가 들렸다. 모두 뛰어나오는데 그 중에 아라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너를 의심하고 욕도 했었구나. 미안하다. 나는 속으로 사과하면서 그에게 다가섰다.『조금만 더 외진 곳에 가 다같이 떠나 자구. 알겠지.』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다른 조선병사에게 말할 수 없었다. 격분한 누군가가 아라이에게 대들며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만일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곧 일본 병사들이 알게 돼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부대는 다시 행군을 계속하여 역속하 라는 곳에서 숙영했다.
그런데 아라이는 그날 밤 기어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부대전체가 술렁이고 분위기는 극도로 살벌해졌다. 나만 잡고 있으면 조선 병사들의 탈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던 대장 오카모토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당황한 것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아라이의 단독탈출로 우리들의 집단탈출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북지 운성에 있을 때 조선병사는 나를 합쳐 9명이었는데 한달 전 한구에서 부대를 개편할 때 황의선·강재식이 타 부대에서 전입, 11명이 되었다. 이제 아라이의 탈출로 10명이 된 것이다.
조선 병사들은 풀이 죽었고 속으로 한없이 아라이를 원망했다.
그리고 일본 병사들은 아라이를 매도하고 조선사람을 욕하며 자못 공기가 험악해져 갔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당시 20세에 불과하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였다. 도대체 의논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북 지에서 천바이랑이 권하는 대로 나 혼자 탈출했더라면 천바이랑도 죽지 않았을 텐데.
일본군인들의 살벌한 눈초리가 모두 내게 쏠리고 있었다. 대장 오카모토의 당번이나를 부르러 왔다.
『올 것이 왔구나』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장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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