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이기는 것(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임해봉 9단이 일본기원에 입단한 것은 13세 때였다. 당시 일본의 매스컴은 대만출신의 이 소년기사를 두고 천재 또는 신동이라는 표현도 오히려 부족한 것처럼 떠들썩했다.
우리의 조치훈 9단이 일본에서 입단한 것은 11세 때였다. 임해봉 9단의 기록을 2년이나 단축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의 최연소 입단기록은 중국과 한국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최연소 입단기록은 일본보다 2년이 빠르다. 조훈현 9단은 9세때 입단했다.
그 조훈현 9단이 국내 모든 타이틀을 휩쓸고 바둑의 통일천하를 이룩한 다음에 한 말은 인상적이다. 『바둑에는 이중의 적이 있다. 하나는 대국의 상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자기자신이다. 바둑은 상대에게 이기는 것 뿐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이겨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기성 오청원 9단도 바둑은 「조화」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말은 흑백의 조화만을 단순히 얘기한 것은 아니다. 냉엄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지는 바둑판 위에는 「머리」만 가지고는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 거기에 「마음」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이기는 것이 머리라고 한다면 자신에게 이기는 것은 마음이다.
이 머리와 마음의 조화를 누구보다도 잘 이루어왔기 때문에 조훈현 9단은 지난 20년간 정상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9단이 지난 24일 제자인 16세의 이창호 4단에게 「왕위」 타이틀을 내줌으로써 「조훈현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
84년 9세때 아마4단의 실력으로 조훈현 문하에 들어와 11세에 입단,스승에 이어 두번째 최연소 입단기록을 세운 이창호 4단은 늘 이런 말을 했다. 『스승의 벽을 허물지 못하면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헛 배운 것이 됩니다.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승을 이겨 보겠습니다.』
그는 이번 왕위전에 이김으로써 국내 9개 타이틀 가운데 4개를 석권,최다관왕이 되었다. 비로소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물론 승부의 세계에는 언제나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또 영원한 승자도 없는 법이다. 단지 머리와 마음의 조화를 누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