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만「이산 중국동포」의 메신저|중화문화 연구원 대표 편영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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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인간사에서 이별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더구나 그것이 핏줄과의 생이별일 때 괴로움은 한이 되어 가슴에 응어리지는 법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에 의해 강제로 혈육과 떨어져 이국 땅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2백만 중국거주동포 대부분도 이산의 한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다.
가족의 생사여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은 이산가족들의 애틋한 소망을 물어주기 위해 순수민간인자 격으로 한중 이산가족 찾기에 나서고 있는 편영우씨(51·중화문화 연구원 대표· 813-4663).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이산가족의 명단을 담은『한중 이산가족 색인부』3천부를 출간, 85년부터 지금까지 7백여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시켜 주었다.
또 편씨가 보낸 색인 부를 보고 모국을 찾아와 혈육의 정을 다시 나눈 중국동포도 3백 여명이나 된다.
지금까지 그가 이 사업에 쓴 경비는 출판 비를 포함, 6천만원 정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여유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맨발로 이 사업을 위해 바쁘게 뛰고 있다.
편씨는『소장하고 있는 고서화를 말아 경비로 충당하고 있다』면서『자금문제가 가장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핏줄을 이어주고 느끼는 보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부인 김순자씨(42)도 사비를 털어 가며 이 일에 몰두하는 편씨에게 불평도 하고 만류도 했다.
작년 말 편씨의 주선으로 일제 때 정신대로 끌려갔다 심양에 주저앉게 된 이모할머니(69)와 한국에 사는 여동생(66)이 김포공항에서 상봉한 적이 있었다.
그때 편씨는 부인 김씨와 같이 김포공항에 나가 이 극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근 50년만에 재회한 두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공항바닥을 뒹굴면서 서로 얼굴을 부 비며 웃고 울기를 30여분. 편씨와 그의 부인도 함께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는 두 할머니의 손에는 서로의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잡혀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부인 김씨도 그후 편씨의 일을 발벗고 나서 도와주게 됐다.
수많은 이산가족의 재회를 주선했던 그는 『작년 말 색인 부를 보고 한국의 여동생(62)이 하얼빈에 사는 오빠(80)에게 초청장을 보내자 이를 본 오빠가 쇼크로 사망한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프다』고 했다.
편씨가「재회의 메신저」역할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83년 중국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만 보인 대로 유학하면서부터.
78년 서울 시립 남산도서관 사서과장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경영하며 중국 성(본관 절강) 인 자신의 성에 대한 뿌리와 평소 중국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오다 유학을 결심했었다.
수료를 6개월쯤 앞둔 85년 초 편씨를 특히 눈여겨보아 오던 지도교수 염병훈 교수가『나도 중국 본토의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산가족』이라며 편씨에게『한중 이산가족 찾기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물론 염 교수도『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편씨는 먼저 중국 동포와 한국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작업부터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85년 말 공부를 마친 편씨는 염 교수의 주선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길림성에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흑룡강성·요령성 등 주로 한인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을 찾은 그는 이곳에만 1백70만 명에 가까운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동포들은 하나같이 편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에 살고 있을 부모·형제의 생사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의 핏줄에 대한 깊은 애착을 직접 확인한 편씨는 이산가족의 아픔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바로 인간의 문제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작업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쉽지 않았다. 중국과는 국교가 없는 데다 워낙 폐쇄적이어서 성사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편씨는 우선 1백여 명의 중국동포 명단을 작성하고 대만 보인대 염 교수의 주선으로 중국작가협회 주석 파 금과 부주석 풍 목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소개로 88년 3월 신화사 홍콩 분사 외사 처장을 면담, 이산가족 문제를 협의했다.
신화사 측에서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될 수 있으면 조용하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하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순수민간 차원에서 한다면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편씨는 곧바로 귀국해 88년7월 일간 신문에「중국에 가족이 계십니까」라는 광고를 냈다.
접수된 신청자들의 나이·성별·주소·헤어지기 전의 상황 등을 수록해 그해 말 2백25가족의 색인 부를 찍어냈다.
그는 이 색인 부를 신화사 중국 본사를 비롯, 길림성의 길림 방송국·연변인민 출판사, 흑룡강성의 흑룡강 신문, 심양의 조선 민보사 등으로 보냈다.
이후 이산가족간의 재회는 속속 이루어졌고 동포들의 고국방문 신청도 줄을 이었다.
편씨는 작년 제2차로 4백 가족에 이르는 색인부 제2권을 만들었다. 그는 또 미처 싣지 못한 1천여 가족의 명단을 수록한 색인부 제3권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편씨는 지난해 중국 동포들이 가져온 한약이 문제가 됐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편씨가 만든 색인 부를 보고 찾아온 동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중국에서 들여오는 한약이나 한약재를 무조건 가짜라고 매도, 단속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포장마차 촌과 같이 일정한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해외동포 관리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행정당국에 제시하기도 했다.
『북방정책도 이산가족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등 민간차원에서 접근, 고리를 풀어 나가야 합니다.』
편씨는 이산가족 찾기의 활성화를 위해 중국에 이산가족 업무를 전담할 민간연락사무소 설치가 시급하다고 했다.
그는 『이산 가족의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못박았다. <정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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