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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새해 맞은 한·일 정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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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시네마 에비뉴엘점에서 '길'을 감상했다. 권양숙 여사와 청와대 수석.보좌관 내외 30여 명이 동행했다. '길'은 1950년대 후반과 70년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아갔던 장돌뱅이 대장장이의 삶을 다루고 있다. 죽마고우에게 배신당해 집을 나섰던 주인공이 20년 뒤 우연히 친구의 딸을 만나고, 그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과거의 오해와 반목을 씻어낸다는 줄거리다.

아베 총리가 본 '유황도…'는 할리우드의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았다. 유황도는 '이오지마'의 한자식 표기. 45년 2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2만여 명이 미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하다가 전멸한 섬이다.

두 영화는 양국의 '오늘'을 생각하게 했다. 영화 감상을 '통치행위'로 해석하는 건 분명 무리지만 어느 정도 상관성은 있어 보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독립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고, 참모들이 '길'을 추천했다"고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등에 무거운 모루(쇠를 두드릴 때 쓰는 받침쇠)를 짊어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영화의 주인공에게서 혹시 요즘의 힘든 자신을 읽지 않았을까. 2년여 전 완성됐고, 현재 극장에서 볼 수 없는 독립영화를 고른 뜻은 또 무엇이었을까.

'유황도…'는 일본인의 시선에서 본 태평양전쟁이다. 일본 배우가 대거 출연했고, 대사도 주로 일본어로 나온다. 감독은 이오지마 전투의 객관적 묘사를 위해 '아버지의 깃발'과 '유황도…' 두 편을 만들었다. '아버지…'에선 미군의 활약을, '유황도…'에선 일본군의 저항을 표현했다. '강대국 일본'을 주창해 온 아베 총리가 섬을 사수하는 일본군에게서 제2의 '야마토 혼(大和魂)'을 발견했을지 모를 일이다.

양국 정상의 '영화 선택'은 간단찮은 여운을 남긴다. 반목.불신을 이겨내고 화해.상생의 메시지를 전하는 '길'이 "모든 공격에 할 말은 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새해 나라 살림에 어떤 암시를 줄지 기대된다. 또 아베 총리는 1일 신년사에서 '평화헌법 개정'을 재확인했다. '유황도…'에 나타난 '일본정신'을 거듭 선언한 건 아닌지. 분명 우리가 경계할 대목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