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수사만 늘어놓던 북한 나흘만에 남북대표 회담 응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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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베이징(北京) 6자회담 무대를 미국과의 양자접촉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북 금융제재 해제 등 북.미 간 현안을 우선 논의해 가닥을 잡은 뒤 본회담 테이블에 제대로 임하겠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19일 평양에서 온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는 주중 미국대사관에서 3시간 동안 머물렀다. 대니얼 글레이저 미 재무부 부차관보와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계좌를 푸는 실무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오후 북.미 양자접촉도 진행됐다.

전날 김계관 북한 측 수석대표가 전체회의 기조연설에서 '핵군축회담'을 거론해 회담장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북.미 양자접촉도 거부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은 BDA 문제에 전력투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려는 협상전술이라는 게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BDA 돈자리(계좌) 동결을 푸는 것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변화의 판단기준"이라던 자신들의 주장이 빈말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란 얘기다.

또 핵 문제는 미국과 풀어야 할 문제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와 함께 모처럼 마련된 미국과의 접촉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13개월 만에 마련된 6자회담 테이블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끌고가려는 뜻일 수 있다. 중간선거에서 패한 부시 행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완화하고 북한과의 양자접촉을 수용한 상황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회담 참석자들에 따르면 6자회담장에서 북한의 태도는 다소 변했다. 북한은 베이징에 온 지 나흘 만인 이날 남북 수석대표 회담에도 응했다. 정부 당국자는 "정치적 레토릭(수사)만 늘어놓던 어제와는 달리 북한이 오늘은 기술적이고 실무적인 부분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견이 좁혀지고 있다.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BDA 협상에서 북한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경우 상황은 다시 반전될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행동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이라며 "BDA 협상 결과가 이번 6자회담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이영종 기자,베이징=이상언 기자

◆ BDA=마카오에 소재한 중국계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 미 재무부가 지난해 9월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 은행'으로 지목하자 마카오 당국은 이 은행 북한 계좌의 예금 인출을 동결했다. 동결된 북한 계좌 2400만 달러 중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6자회담 재개 조건으로 BDA 북한 계좌의 동결 해제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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