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악용과 사생활 보호(사설)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상품선전 팸플릿이나 학습지 선전물같은 것을 우편물로 받고 있다. 사설학원 안내문도 받는다. 정확한 주소와 이름이 적힌 인쇄물을 받을 때 마다 어떻게 인적사항을 알아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갖는다.
대학낙방생 앞으로 재수학원 수강안내문이 배달될 때는 누군가 가정사정까지 소상히 알고 있음에 섬뜩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고 한다. 지난달 26일자(일부 27일) 중앙일보 사회면은 그 수수께끼에 해답을 주고 있다.
개인의 직업이나 나이는 물론 재산·가족관계까지 모든 신상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조직적·체계적으로 확보해놓고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팔아넘기는 사설 정보전문용역업체가 전국적으로 수없이 산재해 있고 증가일로라는 것이다.
이들이 확보하고 있는 개인신상정보는 대부분 말단 행정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정부는 행정전산망용 중앙컴퓨터를 설치해 4천2백만 전국민의 개인신상자료를 입력하는 작업을 이미 끝내고 현재 보완작업이 진행중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개인별 자료가 말단 동사무소로부터 중앙행정기관인 치안본부에 이르기까지 전산망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전국 어디에서나 컴퓨터키만 누르면 국민 개개인의 신상명세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업무의 전산화는 국가행정기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보·금융·교육·의료등 거의 모든 기관이나 단체 또는 기업이 관계된 개인의 정보를 전산화함으로써 개인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는데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물론 재산상태,현금의 보유와 관리,질병의 유무나 건강상태,심지어는 여행등 신체적 이동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첨단기술이 일상화된 것이다.
업무의 전산화는 전자정보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추세다. 컴퓨터의 활용이 모든 분야에서 업무를 효율화하고 서비스를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이 이기가 그만큼 쉽고 완벽하게 오용 또는 남용돼 개인을 귀찮게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심지어는 범죄에까지 악용돼 사생활을 위협할 우려도 커가고 있다.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생활양식이나 행태가 다양해지는 도시화·산업화 사회에서 개인 사생활의 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져가는데 이와 역비례로 정보체계의 발달에 의한 개인정보의 노출가능성도 더욱 증폭되고 있는 현실이다.
개인에 관한 정보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외부로 유출돼 엉뚱하게 이용될 위험을 현 제도로서는 막을 수 없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표를 열람해 남자가 없는 집만 골라 범행한 강력범의 예도 드물지 않다. 지난번 한 탈영병이 폭로해 물의를 빚었던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사건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할 공권력이 오히려 이를 침해한 대표적 본보기라 할 것이다.
사생활의 침해는 컴퓨터에 의한 개인 정보의 유용에서만 기인되는 것은 아니다. 각종 무선 도청장치와 전화 도청기구가 시중 상가에서 값싸게 다량으로 유통되고 있다. 안방에서의 대화나 전화통화마저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팩시밀리 도청방법까지 불법으로 개발된 상태여서 우리도 그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개인이 부지불식간에 발가벗겨지고,가정의 창문과 벽은 허물어져가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첨단 전자장치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사회는 자유민주사회가 아니라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전체주의사회와 다름없다.
미국이나 유럽·일본 등에서는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이미 사생활보호나 통신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이런 부당한 인권침해를 막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는데,우리는 아직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다. 국회가 개인정보 보호법안과 통신비밀 보호법안을 만들어 놓고도 그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부당하고 부도덕한 도청과 개인정보의 유용은 물론 강력하게 단속·처벌돼야 한다. 아울러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행정기관에 입력된 개인정보의 내용을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잘못된 자기 정보는 정정할 수 있는 권한도 명백히 보장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