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재야인사의 만남(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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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수서사건으로 시국이 매우 가파르게 움직이고 있다. 새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학생운동권과 재야가 각기 독립적으로 또는 연대해서 가투를 벌이고 있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시국이 전개될지 걱정부터 앞선다.
일반 국민의 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학생들과 재야는 특히 흐지부지 넘어가고 있는 정부의 수서사건 수사종결방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지도층의 구조화된 부정·부패상이 응결된 이 사건의 철저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체제도전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그야말로 체제존립의 총체적 위기상황이 조성되고 있는데도 체제수호에 앞장서야할 정부와 정치권은 사태수습의 정도를 외면한채 국면전환을 꾀하는 「묘수」만 모색하는 모습이어서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즈음에 노태우 대통령이 26일 낮 사회원로 4명을 초청,시국수습방안에 의견을 듣는 모임을 가진 것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또 그 결과에 기대가 모아지기도 한다.
우리가 이렇게 평가하고 기대하는 까닭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지만 의미있는 이례의 사실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대통령이 초청한 원로 4명중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와 이태영 가정법률상담소장 등 재야인사 2명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과 함께 초청된 김준엽 전 고대총장과 최석채 전 문화방송회장도 고언을 아끼지않는 저명한 원로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체제쪽에 가깝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시국에 대한 견해를 표명해온 인물들이다.
그러나 홍·이씨는 지난 상당한 세월에 정권쪽과는 반대입장의 재야진영에서 체제비판적 시각의 지도역을 맡아온 원로들이다.
그들은 역대 대통령들이 위기때마다 원로들을 초청해 의견을 듣던 여론수렴의 초청대상에서 빠져있었던 인사들이었다.
노대통령이 처음으로 집권측에 부정적이거나 반대해온 재야원로를 의견청취대상으로 초빙했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우리가 일단 고무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현실에 유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관례를 깨고 위기수습을 위해 의견이 현저하게 다른 인사들로부터 반대쪽의 논리와 여론을 생생한 육성으로 듣고 국정운용 방략의 수립에 참고하려는 그 자체는 뜻있는 선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노대통령에게 두가지 고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노대통령은 단순히 이들과의 의견교환을 통해 여론을 광범하게 수렴했다는 형식만 남겨서는 안되며 그들의 타당한 의견개진을 국정에 반영하는 새 언로개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단순한 요식행위로 비쳐질 것이며 이에 응한 인사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둘째,앞으로는 실정법의 형식논리에 얽매이지 말고 이른바 통치권 행사의 차원에서 운동권지도자들과의 대화 통로를 넓혀 들을 것은 듣고 설득할건 설득하는 자리를 활성화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체제파와 반체제파가 대화를 통해 한데 어우려져 보다 바람직한 위기 대응방법에 유연성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개학을 맞아 일부 학생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이러한 언로의 확대를 통해 어느정도 수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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