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쉼] 서명숙의 인생 하프타임 산티아고 순례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기자 생활 20여 년. 몸은 불고 마음은 메말라 갔다. 그러다 알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 급하고, 무섭고, 요란한 속도의 도시를 떠나 그곳에 가기로 했다. 여자 나이 마흔아홉. 걸으며 발견한 인생의 단맛 진맛.

글 싣는 순서

(1)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로

............... 9.10/생 장피드포르

(2) 아, 피레네-난 그대를 얕봤네

(3) 산티아고 사인을 찾아라

(4) 순례자를 먹여 살린 한국 부침개

(5) 삶의 순례자들

(6) 메세타 평원에서 아리랑을

(7) 에스파뇨는 왜 행복할까

(8) 가난 속의 사치, 빗속의 자유

(9) 달과 별이 지켜준 마지막 사흘

(10) "여기가 피니스테레다"

마침내 출발점이다

"… 생 장피드포르(St. jean-pied-de-port) …"

비음이 잔뜩 섞인 프랑스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못 알아듣는 프랑스어지만 역 이름만큼은 화살처럼 귓전에 날아와 꽂혔다. 꿈속에서 수없이 걸었던 그 길이 시작되는 곳,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외던 곳! 그곳에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키 큰 배낭과 등산복으로 완전무장한 이들은 역을 빠져나오자 도마뱀처럼 긴 행렬을 이루었다. 뒤만 따라가면 순례자에게 도보여행 증명서(Credencial del Peregrino)를 발급해 준다는 '산티아고협회'를 찾을 수 있겠지 안도하면서도, 이 많은 사람들과 여행 내내 줄지어서 행군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이게 얼마나 기우였는지는 다음날 즉각 입증되었지만).

이끼 낀 성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본 마을 정경은 천국 입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성문 주변의 작고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하는 순례자들, 바스크족 특산물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의 표정은 생기에 넘쳤고 여유로웠다. 이곳에선 혹 시계조차 느릿느릿 가는 건 아닐까.

담배 … 회사 … 다 끊었다

산티아고 길을 가슴에 품게 된 건 '청춘을 바친' 직장을 그만둔 2003년 봄. 스무해 넘게 해온 기자 일을 접은 때이기도 했다. 긴 세월 언론사 특유의 살인적인 취재 경쟁과 '악마의 빚 독촉'보다 무서운 원고 마감에 시달리면서 술과 담배에 의존했던 탓에 나는 망가진 기계 같았다.

오후만 되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편두통에 시달렸고,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푹 퍼지곤 했다. 해마다 정기 이자 붙듯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날 몰라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몸무게와 반비례해 마음은 날로 메말라 갔다. 이렇게 살다간 책상 앞에서 쓰러지거나 회복 못 할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일단 담배부터 끊었고,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회사까지 '끊었다'. 죽는 건 면했지만 대신 허무감과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몸 바쳐 일해온 직장, 가족보다 더 아꼈던 직장 후배들이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고 즐겁게 지내자 상실감마저 느꼈다. 난 다 파먹은 김장독처럼 텅 비어 군내만 풍기는데….

침대를 벗삼아 지내다가 함께 사는 친정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 해 집을 나섰다.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버스 한 정거장 거리도 걷기 귀찮아 택시를 타고, 직원 등반대회 때 산 중턱에서 헬리콥터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던 내가 걷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중독자의 우울증은 서서히 걷혀갔다. 걷는 데 익숙해진 뒤에는 가시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다. 종류를 불문하고 차들은 걷는 이에게 턱없이 적대적이었고, 길들은 걷다 보면 맥없이 끝나곤 했다. 길과 길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끊어져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럴 즈음 그녀의 책-아쉽게도 이름도 책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다. 여고 졸업 뒤 일찍 결혼해 남편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 간 50대 여성이 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긴 길'이 있음을 일러주었다.

차량의 위협적인 경적음 없이, 도로의 절망적인 끊김 없이 한 달 내내 걸을 수 있는 길! 홀로 길 떠난 이들이 끝까지 혼자일 수 있지만, 맘만 먹으면 글로벌 패밀리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길! 예전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다리가 질질 끌릴 즈음 순례자 증명서만 내밀면 값싼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집단 숙소)'에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길!

책장을 덮는 순간 난 혼잣말로 외쳤다. "꼭 이 길을 걷고 말 거야."

'산티아고 가는 길'이 파올로 코엘류('순례자''연금술사'의 저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의 인생길을 바꾸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 열망은 더 깊고 간절해졌다. 막막하기만 한 내 삶의 후반전에 어떤 암시를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

광속의 세상 … 질렸 다

강화도 들길을 걷고 북한산을 오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중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길을 걷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신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여행작가 김남희가 올리는 '산티아고 일기'라는 연재물(이 기행문은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 2'라는 책으로 엮였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부러워 배가 다 아팠지만 그녀의 여행기를 맨 먼저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한동안은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종이매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갈 데 없는 '낀세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속도감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젊고 열정적인 후배들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언제나 의욕적이고 발랄했지만 난 알아듣기 힘든 신기술 용어와 작동하지 않는 첨단기기 앞에서 점점 주눅 들었다. 50, 60대처럼 아날로그적인 삶을 끝내 고집할 수도, 30, 40대 초반처럼 디지털적인 삶에 쉽게 편승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정쩡한 나이….

가파른 속도는 도처에서 날 위협했다. 요란한 굉음을 동반한 일년여의 공사 끝에 동네 사람들이 무.상추나 심던 아파트 앞 공터에 10층짜리 오피스텔 두 동이 세워지더니 상가에 들어선 가게들은 한밤중까지 네온사인 간판을 켜놓고 노래반주기를 틀어놔 나만의 시간인 밤마저 빼앗아갔다. 더 늦기 전에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영어도 못 하는 아줌마가 혼자서…'.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일본을 경유해 파리를 거쳐 고속철 타고 비욘으로 가 다시 지방선으로 갈아탄 끝에 산티아고 여정의 출발점에 다다른 때는 햇빛이 너무도 눈부신 9월 10일 오후였다.

증명서를 발급받고 자원봉사자가 일러준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 뒤 미리 점찍어 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피레네 발치에 조붓이 엎드린 마을이 노을에 붉게 물드는 광경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다음날 산 위에서 닥칠 일을 까맣게 모른 채.

서명숙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