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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왜 자수성가 부자가 없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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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조직생활을 접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밑천도 인맥도 그저그렇거나 킬러 콘텐츠나 기술 없이는 그 길은 막막하고 멀게 보일 뿐이다. 집안의 후광 없이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하는 것.미국의 격주간 경제지 포브스에 오른 부호들과 우리나라 대표 부자들의 차이점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의 대물림 현상이 미국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포브스와 증권선물거래소 자료로 양국 부자들의 특성을 비교해봤다.

◇자수성가형 미국의 9분의1=증권선물거래소가 매년 공개하는 보유주식 시가총액 순위(2005년 기준)과 <포브스>가 매년 내놓는 4백대 부호(400 Richest Americans)를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는 혼자 힘으로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부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보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비교 대상은 상위 50위까지 압축했다.우리나라는 자수성가형 부호가 전체 50명 가운데 6명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44명에 달했다. 한미 양국의 자수성가형 대 상속증여형 부호의 비율은 1:9였다.

<포브스>가 재산 형성 과정을 구분한 기준에 따라, 우리 부호들의 경우도 해당 재산을 당대에 이룬 경우에 한 해 자수성가형으로 분류했다. 창업주로부터 종자돈과 사업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자신이 기업 가치를 크게 확장시킨 경우엔 자수성가형과 상속증여형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전문가들은 결정적인 재산의 원천이 상속.증여받은 자산이었다는 점에서 상속증여형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자수성가해야 미국에선 성공=생활경제연구소 김방희소장은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는 말은, 곧 그 사람 스스로 부를 일궜다는 자수성가(self-made)의 의미로 쓰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돈을 많이 가지게 된 사람을 뜻한다"고 전했다. 이어 "미국에 비하더라도 일천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자본주의사를 고려하면, 자수성가형 부자의 상대적 부재가 우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단면은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자수성가로 일군 재산이 대개 재단을 통해 사회 공헌 활동에 기부된다. 예를 들어 10여 년 이상 미국의 1, 2위 부호로 꼽혀온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과 버크셔헤더웨이의 워렌 버핏 회장은 이미 자신들의 재산 대부분을 당대에 사회 공익 사업에 기부하기로 공언했다. 그리고 미국의 부호들은 공익 재단을 통해 기부를 한다. 이 재단에는 이들의 배우자나 자녀가 참여하기도 하지만 재단의 재산이 개인 재산은 아니라는 점에서 부호 순위에 오를 일은 거의 없다.

◇대물림 통한 한국의 부의 재생산=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는 자수성가형 부호들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적을까. 고려대 경영학과 조명현 교수는 "거목 아래서 다시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처럼, 중견.중소 기업들조차 대기업 중심 체제에 편입돼 있어서 홀로 성장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나마 1990년대 후반에 불었던 벤처 붐이 예외였다. 50대 부호 가운데는 이 당시 단기간에 급격하게 기업 가치를 키운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16위)과 넥슨의 김정주 사장(24위)이 자수성가형 부호로 꼽힌다. 그 외의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은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8위), 장평순 교원그룹 회장(12위),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13위) 등으로, 국내에서는 영원한 블루오션으로 평가받는 교육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밖의 자수성가형 사업가로는 귀뚜라미보일러의 최진민 회장이 꼽혔다. 교육과 보일러 시장 모두 재벌들이 역량을 집중하지 않거나 관심을 두기 않는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가지, 자수성가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당대에 이룬 부를 사회로 돌리는 기부 문화의 부재도 자수성가형 부호가 많지 않은 배경으로 꼽힌다.

1989년 일곱 명의 동업자와 5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해 '코스닥의 삼성전자'라 불리는 (주)휴맥스를 일궈낸 변대규 사장은 "큰 기업은 늘 크고 작은 기업은 늘 작은, 고인 물 같은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대기업 몇 개만 계속 커지고 작은 기업은 버둥거리는 현 상황은 전혀 건강하다고 볼 수 없는 경제 생태계"라면서 "휴맥스를 비롯한 몇 개의 자수성가형 기업들이 한국의 건강한 경제 생태계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이여영 기자, 그림=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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