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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민중시인 박인로 기리는 영천 「도계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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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민중이란 누구인가. 이 나라에 참다운 민중시인이 있었던가. 이러한 물음앞에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노계 박인로를 가리키게 된다. 우리의 글이 만들어진 다음 우리의 글로 우리의 시를 빼어나게 쓴 시인들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조의 가장 우뚝한 세 봉우리로 담양의 송강 정철, 해남의 고산 윤선도, 그리고 영천의 노계 박인로를 문학사가들은 한결같이 높이 치켜 세워왔다.
정철(1536) 보다는 스물다섯살이 아래이고 윤선도(1587) 보다는 스물여섯살이 위인 박인로. 이 위대한 세 사람의 시인이 16세기 중업 불과 반세기동안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만은 없는 어떤 역사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학사는 위의 삼가시인이 있었기에 그 광채가 하늘에 뻗쳤고 비로소 우리 글과 우리 가락이 겨레의 삶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빚어냈는가를 떳떳하게 말하게 된다.

<흰옷을 즐겨입어>
그러면 왜 박인로만이 민중시인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다음 세가지로 가려낼 수 있다. 첫째, 그는 송강이나 고산과는 달리 높은 반열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큰 시인들은 으레 어려서는 어느 어느 석학들에게 글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법인데 서른살이 되도록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시골에 묻혀 혼자 글을 읽는 야인이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높은 벼슬을 한 바가 없다. 벼슬다운 벼슬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사랑을 받거나 정치싸움에 휘말린 적도 없어 송강·고산처럼 유배살이를 하지않았을 뿐 아니라 한번도 남의 원망을 사는 일없이 철저하게 흰옷을 입고, 흰옷의 깨끗함을 지키며 살았다.
셋째, 그는 의병으로 임진왜란 7년을 종군한 병사시인이었고 전쟁시인이었다. 싸움터에서 병사로서의 용맹·승리·평화를 노래한 시인이 박인로가 아니고 누가 있었던가. 그는 「태평사」 「선상탄」 등 임진왜란을 진중에서 노래한 위대한 전쟁서사시를 남겼다.
넷째, 그는 평생토록 가난을 벗삼아 살았다. 「누항사」는 그가 이 나라의 못사는 백성들 삶을 스스로 달갑게 여기며 더불어 그 삶을 시로 형상화 시켰음을 보게 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정철의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 같은 장시와 윤선도의 「오우가」나 「어부사시사」 같은 시조만 있고 박인로의 시가와 시조가 없었더라면 우리 문학사는 그 빛의 반을 잃었을 것이다. 박인로 같은 천재적 민중시인이 있었기에 송강도 고산도 더불어 그 서있는 자리가 돋보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서울에서 정확히 3백40km 지점, 왼쪽 길 옆에 너비 2m의 자연석을 머리에 얹은 「노계시비」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 시비가 서있는 마을이 경북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이고 이곳에서 박인로는 명종 16년(1561) 6월21일 태어났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52세손이라는 자랑스러운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조에 와서는 퇴락하여 그의 아버지 윤석은 종팔품 벼슬인 승사낭을 지내게 된다. 석의 맏아들인 노계는 선대부터 기둥을 박고 살아온 이 도천리에서 났을 뿐 아니라 후대의 선비들이 그를 기려 세운 도계서원도 이 마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노계의 사당은 경부고속도로의 오른쪽에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도천리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고 대원군이 사액서원 이외의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도계서원이 헐렸다가 1974년 후손들에 의해 노계의 묘소와 작은 저수지를 사이에 하고 마주보고 있는 언덕에 다시 세워졌다.
이 도계서원의 옆에는 자료관으로 「노계집」 판목 55점이 보관되어 있고 서원에서 바라보면 만년에 박인로가 살았다는 노계 골짜기가 있는 대현산(월성군 산내면 대현리)이 멀리 보인다. 그러고 보면 지금 한 나라 대시인의 무덤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고 비석도 넉자 높이에 「노계박선생지묘」라고 비바람에 깎인 채 쓰러질 듯 서있는 대양산의 낮은 뫼등도 대현산이 흘러온 것이라 대자연만이 넉넉하게 노계의 시혼을 껴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른한살 때 임란>
노계는 서른살까지 이 도천리에 묻혀 산다. 열세살 때 「낮잠놀라 깨우는 오디새 소리/어찌 시골 사람만 재촉하느냐/저 서울 높은 집 처마 끝에 울어/밭 갈라고 우는 새가 있음을 알릴 것을」 하는 「오디새(대승음)」 라는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오지만 누구에게 글을 배웠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정규양이 쓴 「박공행상」에 「글자를 가르치지 아니해도 스스로 능히 해석하고(부교학이 자능통해)」라고 쓰였으니 글읽기를 혼자 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박인로가 서른한살 때(1592)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4월13일 동래에 쳐들어온 왜구는 파죽지세로 열흘만인 23일 영양(지금 영천)을 함락시킨다.
이때 영양에서 정세아가 의병을 일으켜 왜구와 싸우는데 박인로는 붓을 던지고 정세아의 휘하에 들어가 「별시위」로 전쟁터에 나간다. 나라의 위태로움에 읽던 책을 덮고 창을 들고 왜구를 무찌르러 일어선 박인로는 그날부터 용맹스러운 병사였다.
섬 오랑캐들 하루 아침에 쳐들어와
온 겨레 놀란 혼백 칼빛에 일어나니
들녘에 쌓인 뼈는 산보다 높아 있고
큰 도시 큰 고을은 승냥이굴 되었거늘
이는 73행 진중시 「태평사」(1598)의 한 구절이거니와 전쟁속에서도 시로써 적을 증오하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시를 썼다는 것은 그의 병사로서의 임무 위에 시인으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을 읽을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이지만 왜적을 막기위해 부산에 통주사로 있을 때 지은 「선상탄」에서도 「하물며 이 몸은 손발이 갖춰있고/명맥이 이었으니/쥐나 개같은 좀도둑들 조금치나 두려우랴/나는 배에 달려들어 선봉을 내려치면/구시월 서릿바람에 낙엽같이 헤치리라」고 포효한다.
그런가 하면 현역에서 은퇴한 50세 때(1611)에는 동갑내기이며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과 교유하면서 「사제곡」과 「누항사」를 지었는데 한음이 은거하던 사제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를 대신해 노래했고 한음이 노계가 사는 곳의 가난한 생활을 묻자 답으로 쓴 「누항사」는 당시에 민중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부족커든 봄인들 넉넉하며
주머니 비었거든 항아리에 담겼으랴
가난한 인생이 천지간에 나뿐이랴
가난도 이쯤되면 익을대로 익어있다. 여기에 사상과 정신을 알게하는 오언이 한 수 있다.

<민중의 삶을 노래>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것은 귀히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탐내는 것은 탐내지 않는다. 다만 강 위의 바람과 달과 더불어 사는 일이 나의 백년을 탐하는 것이다.
(부귀인소귀 부탐인소탐 강상풍여월 시아백년탐)
최기남이라는 진사에게 준 이 시에서 그가 세속의 때에 젖지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몸과 마음을 씻으며 살겠다는 개결한 뜻을 역력히 나타내고 있다.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 즉도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노라
경부고속도로 길 옆에 서있는 노계시비의 뒷면에 새겨진 그의 대표작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을 조홍감을 두고 읊었거니와 이밖에도 67편 시조가 하나같이 이 나라 시문학의 정수로 겨레의 가슴에 새김질을 하고 있다. 장시로서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악당」 「영항가」 「노계가」 등 7편과 더불어 저 찬란한 호남시단의 큰 봉우리들을 노계 혼자서 맞서고 있다 하겠다.
「노계집」은 3권 2책으로 정조 24년(1800)에 처음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광무 8년(1904)에 나왔다.
그의 문학은 나라의 위기에 전쟁을 노래했고, 민중의 삶을 묘사했고, 강산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폭넓음을 지니고 있다. 특히 「누항사」에서 보여준 사실적인 기법이나 「태평사」 「선상탄」에 나타난 장엄한 울림은 송강이나 고산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민중시인 박인로의 시정신이 흠뻑 우러나는 대작들이다.
도계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그의 후손인 박병륜옹(76)은 노계가 충무공 이순신의 사위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아니라고 했는데요」라고 반문했더니 「할머니가 덕수이씨인데!」 라면서 펄쩍 뛴다. 하기는 밀양박씨세보(1935년)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누가 부인하랴. 충무공의 사위거나 아니거나 노계는 그 혼자만으로도 하늘의 햇빛만큼이나 겨레의 시를 밝게 비춰주고 있지 않은가.

<도천리에 와서 -노계선생>
1.
봄볕이 목마르다
여기 저기 풀섶같이 돋아나는 그대
낮은 둑으로 못물을 담았어도
반천년 긴 꿈을 적실수는 없다
흰옷의 백성들 삭정이 등짐지고
쓰디쓴 가난을 달게 삼켰거니
어린 시인의 낮잠을 깨우는
오디새의 울음인들 무엇에 쓰랴
영화로움은 흘겨도 보지 않는 그대
썩은 볏짚속에 묻혀 살아도
이 나라 밝히는 큰 빛이구나
2.
나라가 흔들린다
먹물같은 세월이 씻기지를 않는다
손으로는 하늘을 내젓고
발로는 비산비야를 달린다
구름 떼 같은 적 앞에서
내목숨은 풀잎이었으나
겨레에 바치는 노래를 부르면
강물도 숨죽여 흘렀느니라
아직도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벼루와 붓을 가져다다오
오늘 나는 다시 태평사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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